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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이 살던 마을 와룡동
날짜  2015-4-7 8:20:18   조회  956

창동학교는 8.15광복을 맞은후 다시 와룡동에 부활한다. 이때 마을사람들은 서쪽 산비탈의 옛터를 버리고 마을북쪽의 평지에 따로 학교건물을 세웠다. 김동욱옹은 어릴 때 새로 지은 이 창동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때 그가 학교를 내놓고 또 과외처럼 즐겨 다니던 곳이 있었다. 그와 또래들은 례배를 보는 날이면 학교북쪽에 있는 교회당으로 반달음을 놓았다.

“전씨 성의 집사가 우리 아이들을 모여놓고 재미있는 옛말을 들려줬지요.”

교회의 전집사는 조선 리순신장군이 거북선으로 일본 전함을 물리치던 이야기 등을 구수하게 풀어놓았다고 한다. 서적이 금처럼 귀하고 별다른 문화생활이 없었던 시골에서 정말 하늘에서 들려오는 복음과 같았다.

조선인 이민들의 최초의 민족계몽운동과 반일운동은 이처럼 신앙공동체를 통해 구현되였던것이다.

간도에서 선교활동은 조선인 간민들의 대량 이주와 더불어 시작되였다. 카나다장로회는 북간도에 선교사와 전도자를 파송, 1906년 광제암교회를 설립하였다. 뒤미처 룡정의 기독교인이 간도의 조선인 전도를 위해 멀리 함경도 원산까지 가 기독교 서적을 구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도가 본격 시작되였다고 한다.

1907년 남감리회는 리화춘과 리응현, 카나다장로회는 김문삼을 간도에 파송한다. 리화춘은 와룡동교회, 리응현은 모아산교회를 설립하며 장로회는 룡정교회를 설립하였다. 모아산은 와룡동골짜기에서 바로 정남쪽 방향으로 보이는 둥그런 산이다. 1915년경 간도에 36개 교회가 개척되며 또 교회의 주도로 많은 학교가 세워진다.

간도지역 최초의 민족운동단체인 “연변교민회”(후날 국민회로 개칭)는 기독인사들에 의해 세워졌다. 국민회를 통한 기독인들의 반일운동은 군자금모금, 독립군양성 등으로 이어졌다.

바로 창동학교에 국민회의 외곽단체인 간도대한청년회 본부가 설치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학교의 많은 교원과 학생, 졸업생들은 철혈광복단에 참가하여 희생적으로 싸웠다. 1920년 룡정 선바위부근에서 조선은행권 15만원을 탈취한 “15만원 탈취사건”의 골간 임국정, 최봉설, 한상호 등 반일지사들은 모두 와룡동 출신이다.

와룡동에서 교세는 연변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8.15광복후 내리막길을 걸으며 미구에 철거의 파국을 맞는다.

그러나 김신숙(1938년 출생)로인이 와룡동으로 시집을 오던 1956년에만 해도 와룡동교회의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때 김신숙로인은 바로 와룡동교회의 례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목사가 그들의 결혼 주례를 선것은 아니였다.

“그때 교회는 이름뿐이였지요. 벌써 례배를 보지 않고있었습니다.”

수십평 크기의 교회건물은 사람 하나 없이 방치되여있었다. 김신숙로인의 시집은 마침 길 건너 바로 서쪽에 있는 이 널찍한 교회당을 례식장으로 사용했던것이다.

우리 일행이 발길을 멈춘 곳은 와룡동의 제일 북쪽이였다. 거기에는 고층건물의 휴양소가 땅을 박차고 일어서고있었다. 이 휴양소 앞마당의 동쪽 귀퉁이가 바로 교회당 옛터였다. 옛터에는 시공현장의 철근과 나무쪼각따위가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와룡동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던 와룡동교회는 그렇게 력사의 흔적을 서서히 지워가고있었다.

지난 세기 80년대까지 민흥촌의 직속마을이였던 과수마을도 어느덧 집단기억에서 소실되고있었다. 과수마을은 일명 5대 마을로 서쪽의 고개너머 산등성이에 있었는데 예전에 동쪽의 와룡동과 짝을 맞춰 와호동(卧虎洞)이라고 불렸다는 속설이 있다.

이쯤하면 누군가는 대뜸 와룡동과 와호동을 두고 좌청룡이요, 우백호요 하면서 풍수설을 들먹거리겠지만 실은 이 지명이 룡과 호랑이가 서로 싸운다는 룡호상박(龙虎相搏)의 기세를 은유하고있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 와룡동마을에 영웅호걸이 많이 배출되였다는것이다.

옛날의 샘물은 와룡동의 동쪽골짜기에서 예나 제나 변함없이 퐁퐁 솟아나고있었다. 그러나 샘물을 마시던 룡은 단지 지명에 화석으로 외롭게 남아있을뿐이였다…

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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