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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전설, 항일장령 무정장군의 인생비화
리함
날짜  2016-11-28 7:48:28   조회  948

 사천성 홍원대초원에서 찍은 사진. (2011년 8월 1일 현지촬영)

무정소속 중앙홍군은 거듭되는 기아와의 싸움을 벌리면서 7월 2일에 세번째 대설산-장반산(长板山)을 넘었다. 7월 6일에는 네번째 대설산 타고산(打鼓山)을 넘고 7월 7일에는 마지막 대설산 타라강(拖罗岗,又名仓德山)을 넘었다. 무정은 중앙홍군의 련속적인 대설산 돌파는 북상전략에 따른 중공중앙과 중앙군위의 강력한 조치이고 남하를 주장하는 장국도와의 투쟁의 길임을 잘 알고있었다.

무정은 모진 기아속에도 7월 8일 홍3군단을 따라 량하구 북쪽에 자리잡은 흑수로화(黑水芦花)지구에 들어서면서 장국도의 소행에 대해 보다 경각성을 높였다. 아니나다를가 초지를 지날 준비를 하면서 흑수로화에 머무르며 초지를 지날 준비를 하던 8일과 9일 사이 장국도가 팽덕회를 찾았다.

“강서를 출발한 다음 당신의 부대는 무척 고생스럽고 손실이 엄청납니다. 내가 당신에게 3개 사를 주어 당신의 지휘를 따르도록 하지요.”

“뭐래요? 3개 사를 주겠다구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팽덕회는 펄쩍 뛰였다. 그날 밤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정치위원 양상곤과 장국도와의 만남을 알리면서도 분을 삭히지 못했다.

“장국도 이 물건짝이 나 팽덕회를 무슨 사람으로 보는거요? 나를 군벌로 본단 말이요. 내가 군벌로 될거면 홍군이 되지도 않았을거요. 정말 당치않을 소리지.”

이는 홍3군단 정위였던 양상곤이 1998년에 “대장군 팽덕회를 추모하여”란 추모글에서 회고한 한 단락이다. 추모글에서 양상곤은 팽덕회동지는 나 생애에서 가장 친밀한 전우라고 밝히면서 팽덕회가 장국도를 만난 일을 회고했다. 그러면서 자기와 한 팽덕회의 말은 당중앙의 북상전략방침을 견결히 따르려는 엄정한 립장, 대의를 중요시하고 회리회의에서의 질책을 개의치 않는 고상한 품질을 보여주고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팽덕회는 바로 이런 대바른 사람이였다. 그는 자기의 조수로 뛰는 군단참모 무정과도 장국도와의 만남을 터놓으면서 장국도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짝이라고 거침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면서도 장국도 이 사람은 야심이 있는 사람이여서 당과 홍군의 최고권력을 엿본다면서 홍3군단이 장국도를 직접 견제하여야겠다고 말하기를 잊지 않는다. 또 아무때든 일을 칠 사람이니 늘 경각성을 높이면서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정은 사태의 엄중성을 깨닫게 되였다. 팽군단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정은 장국도 이 사람은 다른 길로 나아가는 사람이라는 직감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팽덕회군단장을 받들어 장국도와 그의 편에 선 사람들의 일거일동에 면밀한 주의를 돌리는데 7월 9일 장국도는 “천섬성위”(川陕省委)의 명의로 중공중앙에 전보를 보내면서 홍군총사령부를 개조하며 진창호(陈昌浩)를 홍군총정위로 임명할것을 요구하였다.

7월 18일 덩달아난 진창호는 장국도의 선동하에서 이른바 “집중군사령도”(集中军事领导)를 제기하면서 장국도가 군위주석을 맡고 주덕이 전적지휘를 맡아야 한다고 떠들었다. 대의로부터 출발한 중공중앙과 중앙군위는 6월 29일 장국도를 중앙군사혁명위원회 부주석으로, 서향전과 진창호를 중앙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한 뒤 홍1방면군과 홍4방면군의 단결과 공동북상을 위하여 7월 18일 또 장국도를 홍군총정치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중공중앙과 중앙혁명군사위원회로 볼 때, 혁명의 전반 국면으로부터 볼 때 홍1방면군과 홍4방면군의 단결과 서로의 신임, 량대 주력홍군의 통일적인 행동이 우선이였다. 중공중앙 정치국은 로화에 머무른 나날ㅡ7월 21일부터 22일까지 정치국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지점은 오늘의 흑수현 택개향 로화촌 로화중학교내(黑水县泽盖乡芦花村芦花中学内)로 알려진다. 회의의 중심의제는 홍4방면군이 악예환(鄂豫皖)근거지로부터 천섬(川陕)근거지에 이르기까지의 이 계단 력사경험교훈을 총화하는것이였다. 회의는 4방면군 발전력사에 대한 장국도의 보고와 서향전, 진창호의 보충보고를 청취한 뒤 홍4방면군의 사업을 긍정하였으며 서로의 리해와 단결을 강구하였다.

이에 따라 중앙혁명군사위원회는 7월 21일 홍군전적총지휘부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서향전을 전적총지휘로, 진창호를 정치위원으로, 엽검영을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또 중앙홍군의 홍1군단과 홍3군단, 홍5군단, 홍9군단의 군단부름을 각기 군으로 격하(본 평전에서는 독자들의 리해의 편리를 위하여 그뒤 섬감지대로 개편되기까지 기간 내내 홍1군단, 홍3군단이라 칭함을 밝혀둔다.)하기로 하였다. 홍4방면군을 단결하여 북상항일의 방침을 집행하기 위한 전략수요였다. 홍4방면군의 각 군단 부름은 변하지 않았다. 이 시기까지는 장국도의 야심팽창이 로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팽덕회는 경계를 두며 물건짝이라고 하면서도 이 결의를 따른것으로 보인다. 무정은 로화회의 결의를 따르며 팽덕회의 지시에 좇았지만 팽덕회가 장국도를 물건짝이라고 욕한 일을 잊을수가 없었다.

망망초지 600리

중앙군위에서는 송번전역계획을 제정하고 홍군부대를 좌, 중, 우 3로군으로 나누었지만 장국도의 교란으로 1, 4방면군의 통일행동이 영향을 받은데서 송번전역계획을 이룰수가 없었다. 8월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 중공중앙은 모아개 부근의 사와(沙窝, 오늘의 송번현 모아개구 하팔채향 사와채자-松潘县毛尔盖区下八寨乡的沙窝寨子, 즉 血洛)에서 정치국회의를 가지고 “1, 4방면군이 회합한후의 정치형세와 과업에 관한 중앙의 결의” (中央关于一、四方面军会合后的政治形势与任务的决议)를 통과하였다. 결의는 량하구회의결의의 정확성을 다시 천명하면서 천섬감(川陕甘)쏘베트근거지를 창설하는것이 1, 4방면군의 당면의 력사과업이라고 지적하였다.

회의는 조직문제를 토의하면서 1, 4방면군을 통털어 좌우 2개 로군으로 새롭게 편성하기로 하고 좌로군을 주덕과 장국도가 이끌기로 하였다. 우로군은 서향전(徐向前)과 진창호가 이끌고 모아개(毛尔盖)로부터 초지를 지나 반우로 진출하기로 결의를 지었다. 중공중앙과 중앙혁명군사위원회는 우로군을 따라 행동하기로 하였다.

사와(沙窝)회의는 총적으로 보아 1, 4 방면군을 통털어 좌우 로군으로 나누어 초지를 지나 계속 북상하기로 한 회의였다. 무정소속 홍3군단은 홍1군단, 군위종대 일부, 홍군대학, 군위간부퇀을 개편하여 조직된 홍군학교 특과퇀과 함께 홍4방면군의 제4군, 제30군과 더불어 우로군(서향전과 진창호가 지휘)을 이루어 모아개를 중심으로 집결하여 초지를 지나 반우(班佑), 파서(巴西)로 진군하게 되였다. 좌로군은 주덕과 장국도가 지휘하기로 하고 좌로군 산하에 4방면군의 9군, 31군, 33군과 1방면군의 5군, 9군, 군위종대 일부를 망라하기로 하였다. 좌로군은 쭤커지를 중심으로 집결하면서 마얼캉북쪽의 아파(阿坝)지구로 진출한 다음 다시 동으로 반우, 파서 지구로 움직이면서 우로군과 더불어 감남으로 진군하기로 하였다.

8월 11일, 중공중앙과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홍1방면군과 홍4방면군으로 이루어진 좌우 2개 로군이 적당한 시기에 모아개지구를 떠나 반우, 파서로 진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홍3군단 정치위원 양상곤이 3군단을 떠나 홍군총정치부 부주임으로 소환되고 리부춘이 홍3군단 신임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였다.

리부춘(李富春)은 1900년 생이고 호남 장사사람으로서 일찍 프랑스에 가 근공검학하면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고 모스크바 동방대학에 가 정치와 군사를 배우기도 한 혁명가였다. 1934년 10월, 중앙홍군이 장정을 시작한후에는 홍군총정치부 부주임으로 부임하여 부상으로 완쾌되지 못한 홍군총정치부 주임 왕가상을 대신하여 총정치부 사업을 주최하다가 홍3군단 정치위원으로 소환되여왔다. 무정은 홍3군단 군단장 팽덕회와 군단 정치위원 양상곤을 받들어 군단참모 역할을 잘하던것처럼 계속 군단장과 새로 부임한 정치위원을 한맘으로 받들면서 군단 전체의 초지진군의 준비를 까근히 밀고나갔다.

8월 20일, 초지를 앞둔 모아개에서 중공중앙과 중앙군위에서는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모아개는 오늘의 사천성 아파장족챵족자치주 송번현 서부에 위치하였다. 회의는 치중하여 홍군주력의 발전방향문제를 토의하였다. 이에 따라 회의에서는 “목전 전략방침에 관한 보충결정”과 더불어 우로군을 북진주력으로 하고 좌로군이 반우, 파서 지구에서 우로군과 회합하여 공동북진할데 관한 전문결정을 지었다.

8월 21일, 무정소속 중앙홍군- 홍1방면군은 제4퇀과 4방면군 관련 퇀으로 우로군 선견부대를 구성하여 모아개를 출발하여 인적이 드문 망망한 초지길에 들어섰다. 잇달아 우로군 전체가 초지길에 올랐다. 초지에서의 어려움을 두고 홍군학교 특과퇀 정치위원 송임궁은 이렇게 회고하여 보았다.

초지를 지날 때 날씨가 변화무쌍하여 개이다가도 흐리거나 비가 온다면 곧 내리였다. 일반적으로 오후 3시부터 4시쯤까지는 행군할수가 없었다. 가장 걷기 어려운 곳은 소택지이다. 다만 풀뿌리를 밟으며 걸어야지 진창에 빠지면 빠질수록 깊어져 나오기 어려우며 목숨까지 잃게 된다. 우리는 이런 초지에서 밤낮 7주야나 걸었다…초지를 지날 때 희생된 동지들이 적지 않다.

송임궁의 회고 한부분이다. 개략적인 회고여서 초지의 간고함을 말하고 스쳐지나지만 중앙홍군이 옹근 7주야, 300킬로메터나 걸은 초지의 간고함은 이루다 서술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나타난다.

먼저 홍군이 지나야 할 사천 서북부의 초원을 헤아린다면 오늘날 초원은 눠얼까이(诺尔盖)대초원과 홍원(红原)대초원, 아파(阿坝)대초원 3대 초원으로 나뉘여진다. 이 3대 초원은 사천성의 서북부에 위치하며 청장고원의 변두리와 가깝다. 또 대륙성 고원 한대온대 계절기후대로서 한해치고 봄과 가을, 겨울 세계절뿐이며 여름이 없다. 매년 5월 하순부터 8월 하순까지가 봄이고 8월 하순부터 10월말까지가 가을이며 11월 초순부터 이듬해 5월까지 겨울. 3대 초원은 장족거주지에 속하며 초원의 주요주민들은 장족동포들이다. 그중 모택동의 중앙홍군이 지난 송번초지(松潘草地)는 오늘날 눠얼까이대초원이라고 하는데 종횡 300킬로메터요, 해발이 평균 3500메터 이상으로 헤아려진다.

오늘날 사천 서북부의 3대 초원 간략한 개괄이라면 오늘날 대초원들에는 여러갈래의 신작로가 쭈욱쭉 뻗어있고 곳곳에 모우와 말, 양들이 풀을 뜯고있어 사천서북북 풍격이 독특한 초원관광풍경을 이루고있다. 그러나 그제날 이곳 초원들은 송임궁의 회고처럼 한발작만 잘못 디디면 깊이를 알수 없는 진창수렁에 빠지여 헤여나오기가 어렵다. 지금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초지를 지나는 홍군들은 흔히 한곳으로 쭉 나아가기가 일쑤인데 장정 현실은 그렇게 초지를 지나려면 언녕 잘못되고만다. 서로 디딘 곳을 련속 디딘다면 뭐가 될가? 하기에 홍군들은 소택지에 이르러서는 흔히 서로 뒤를 따르는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디딜만한 곳을 찾으며 나아간다.

초원의 대부분 물은 또 마실수가 없다. 오랜 기간 비는 내려도 배수가 잘되지 않아 대면적의 소택지들이 형성되였는데 이렇게 풀과 물이 썩으며 고인 물은 치명적인 독성을 가지고있다. 어떤 때 풀에 발을 베여 주의하지 않으면 독성을 가진 물에 중독되여 벌겋게 부어나지 않으면 상처부위가 썩어들게 된다. 때문에 소택지를 헤쳐나갈 때면 풀뿌리들이 엉킨 부분을 골라 천천히 가볍게 지나며 무척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초원지역은 기후도 극히 악렬하고 변덕스러워 매일이다싶이 비가 내리며 1년 365일 개인 날이 별반 없다고 한다. 년평균 기온이 섭씨 0도 이하여서 늘 짙은 안개를 동반하여 하늘땅을 뒤덮으며 음침한 찬바람을 몰아오지 않으면 우박이나 눈송이를 휘날려 추위가 말이 아니다. 뒤의 답사부분에서 밝혀보지만 필자가 홍원대초원을 거치여볼 때 홍원현 소재지 부근의 많은 장족동포들은 7월의 날씨에도 이른 봄이나 늦가을 시기처럼 두툼한 옷들을 입고있었다. 아침저녁 날씨는 우리가 말하는 한여름에도 정말 추웠다.

홍군의 옷차림새는 어떠했을가? 믿음직한 전문자료를 찾아보니 중앙홍군은 강서땅을 떠나 장정길에 오를 때 인당 두벌 옷을 내주고 귀주 준의에서 한벌을 또 내주었다고 하는데 사천의 대초지에 이를 때는 이미 거의 10개월이 되여 해지지 않고 완정한 옷을 입고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비는 계속 내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비가 없어 옷들은 후줄근히 젖어만 있다. 그것도 불을 지펴 말릴만한 조건도 안되고 초원의 추위속에서 말이다. 오죽하면 특과퇀 간부휴양련에 소속된 동필무가 이렇게 회고할가.

초지를 지나던 그 며칠간 날마다 비를 만났다. 적은 비가 아니였다. 축축한 정도가 아니라 발은 물에 잠긴 풀숲을 헤쳐야 했다. 우비가 있는 사람은 그래도 조금 나았지만 우비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우비가 없는 사람은 온몸이 흠뻑 젖는다. 비가 내리지 않을 때도 날씨는 언제나 을씨년스럽기만 하여 바람이 세차고 춥기만 하였다.

초지의 어려움을 말해주는 한 부분이다. 어려움은 이뿐이 아니다. 초지를 지나는 행군길은 600리에 7일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지만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병까지 겹쳐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으로 죽는 사람이 매일이다싶이 있었다. 그래도 홍군장병들의 정신상태만은 좋아 행군도중 휴식나팔소리만 들리면 서로 모여앉아 전한 작사, 섭이 작곡으로 된 “의용군행진곡”(후날의 중화인민공화국 국가) 등 혁명가곡을 부르며 혁명승리 신념으로 가슴을 불태웠다는이들.

우리의 홍군장병들은 그렇게, 그렇게 대자연속 악렬하고 변덕스런 초지, 인류생명의 금지구인 초지를 걸어냈다. 그가운데의 한 사람이 홍3군단 포병지휘관이고 군단 참모인 무정이다. 이같은 신분의 무정은 군단장 팽덕회를 받들어 홍3군단의 초지길 이모저모를 살피며 지도하며 받들어야 했지만 직속포병련의 초지통과를 지휘하여야 했다. 홍3군단 포병들은 홍1군단 포병들과 더불어 쉴 때면 박격포를 안은채 등과 등을 맞대고 앉아서 엷은 군복으로 비를 막기도 하고 가물거리는 우등불로 추위를 달래기도 하였다. 그러던 무정은 여느 홍군장병들과 마찬가지로 너무도 주림에 시달리면서 심한 위병에 걸렸다. 위궤양이라고 한다.

홍군포병, 그네들은 장정길에 오른 중앙홍군대오속의 홍군장병들이였다. 그네들은 혁명승리에 대한 오직 하나의 신념으로 모진 기아와 추위와 비바람을 이겨내면서 박격포 등을 메고들고 적들이 죽음의 초지, 지옥의 초지(绝境的草地)라고 일컫는 생사의 극히 위험한 경지에서 망망한 초지 600리를 걸어내면서 중앙홍군과 더불어 인류력사의 기적, 전대미문의 기적을 창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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