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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전설, 항일장령 무정장군의 인생비화
리함
날짜  2016-12-5 8:39:15   조회  762

 

 사천성 뤄얼까이현(若尔盖县) 파서향 상파서촌에 자리한 “파서회의” 옛터. (2011년 8월 1일 현지촬영)

반우와 파서의 웃음소리

우리의 홍군포병들이 소속부대를 따라 7일만에 사천 최서단 가까이 반우(班佑)에 이르니 살것만 같다. 그속에서 무정이 웃고 떠들며 박격포를 어루쓴다. 밀도 익어가고 먹을것도 많아졌다. 대설산, 초지길에 지친 홍군포병들과 우로군은 환락속에 잠겼다. 반우를 눈앞에 두었을 때 홍군장병들속에서 전해진 장족포이야기를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 반우는 장족동포들이 사는 마을로서 장족포들이 많았다. 이 장족포를 두고 홍군장병들속에서는 “양옥”(洋房)에서 자게 된다는 웃음거리가 생겨났다. 기분을 돋우는 웃음거리였다. 망망한 초지를 지난던 홍군대오로 말하면 반우의 장족포는 “양옥”이라 할만도 하였다.

그런데 초지를 지난 우로군은 좌로군을 기다리면서 전진의 길을 멈추고 파서와 아서 등지에 머물러야 했다. 장정길에서의 원 군위 제1야전종대 사령원이였던 리유한은 한편의 회고문에서 우로군 전적총지휘부는 반우의 큰절(大寺庙)에 거처를 정하고 모택동은 홍군학교특과퇀을 직접 거느리고 팽덕회가 이끄는 3군단과 함께 반우에서 동으로 5킬로메터쯤 떨어진 파서에 주둔하였다고 하였다. 미국작가 해리슨 솔즈버리(哈里森·索尔兹伯里)는 자기가 쓴 “장정ㅡ전대미문의 이야기”(长征--前所未闻的故事)에서 우로군지휘부와 모택동의 숙박지를 보다 상세히 밝혀 독자들의 짙은 흥미를 끄당긴다.

미국작가 해리슨 솔즈버리(1908.11—1993.5)는 미국 미네소타주 사람으로 1930년부터 1948년까지 UP통신사 기자, 편집으로 뛰였고 1949년 3월부터 《뉴욕타임즈》 모스크바 주재기자로 5년 남짓한 세월을 보냈다. 1961년 이후에는 《뉴욕타임즈》 편집, 조리부총편집, 부총편집으로 근무했다. 2차대전기간에는 쏘련 각지 전선을 현지취재하면서 작품집 《레닌그라드 900일》(列宁格勒被困九百天)을 출판하기도 했다.

2차대전기간에 해리슨 솔즈버리는 《서행만기》(西行漫记, 원명: 붉은별 중국을 비춘다)의 저자인 에드가 스노(埃德加·斯诺)와 함께 쏘련 전방기자로 활약하면서 “장정ㅡ전대미문의 이야기”를 써낼 결심을 굳히게 되였다. 해리슨 솔즈버리는 과연 1972년 이후 선후 5차 중국을 방문하면서 1984년 3월부터 6월 사이 중국 관련 부문의 허가로 장정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관련인원의 안내하에 70여세의 몸으로 홍군장정길 현지답사길에 올랐다. 1986년에는 끝끝내 이 실기문학작품을 써내고야말았다.

해리슨 솔즈버리는 미국작가이고 미국작가협회 주석이기도 하였다. 그후 《장정ㅡ전대미문의 이야기》는 중국에서 출판,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저자가 본 책은 2005년 3월 해방군출판사에서 출판한 《장정ㅡ전대미문의 이야기》이다. 이 책은 도합 30장으로 된 실기문학작품집으로서 저자는 제26장 “암흙의 나날 빛나는 영예” (黑暗的时刻,光辉的荣耀)에서 홍군장정 도중의 반우의 나날을 이렇게 쓰고있다.

우로군지휘부는 반우에 정하였다. 마을이 아니고 마을 변두리 버드나무숲(一片柳林)이였다. 그러나 비교적 큰 마을의 몇몇 전포(毡包)들은 깨끗이 거두어 회의할 때 사용했다. 버드나무숲은 1984년에도 그대로 있었는데 깨끗하고도 아름다왔다. 그때 약 70세대 인가들이 마을에서 생활하고있었다…

서향전, 진창호(陈昌洁), 엽검영과 양상곤이 지휘부를 여기에 정하였다. 모택동은 혼자서 서로 바라보이는 강 대안(小河对岸一箭之遥的地方)에 숙박지를 정했다. 팽덕회의 제3군단은 약 4영리(英里) 밖의 파서에 있었다.

해리슨 솔즈버리의 서술이다. 1영리는 1.6킬로메터로서 4영리는 약 6.4킬로메터이다. 관련자료를 보면 팽덕회의 홍3군단은 확실히 파서 부근의 아서 야눙채(阿西牙弄寨)에 주둔지를 잡았다. 모택동은 반우의 지휘부에 있기도 하고 야눙채에 있기도 하였다. 주은래와 왕가상이 모두 야눙채에 주숙하였다. 병상에 누운 주은래와 왕가상(王稼祥)의 몸은 점차 회복되고있었지만 자리에서 일어설수가 없어 제3군단 사령부에서 직접 돌보고있었다. 홍3군단 참모 무정은 당과 홍군의 지도자들인 주은래와 왕가상의 병실을 무시로 드나들며 보살피며 지켜서면서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시로 찾아오거나 숙박하는 모택동과 중앙지도자들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담보하여나섰다.

전반 장정길을 굽어보면 모택동이 있고 중앙군위가 머무른 곳에는 언제나 양림소속 원 군위간부퇀이 있고 무정소속 홍3군단이 있었다. 설산초지를 지나 이른 반우, 파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은래와 왕가상이 홍3군단의 주둔지에 머무르니 더욱 그러하다. 한편 무정소속부대와 양림소속부대는 파서에서 매일 무우, 호두, 닦은 밀 등을 배불리 먹으며 재빨리 체력을 회복하였다. 더러워진 옷들도 깨끗이 빨아입고 머리도 깎고 더부룩한 수염도 밀어내니 본래의 면모로 돌아왔다. 이런 참신한 환경속에서 무정과 양림 소속부대는 우로군의 홍군장병들과 더불어 저마다 몇근의 닦은 밀을 건량(干粮)으로 준비하고 헝겊과 양털 등으로 초신도 만들어내며 좌로군의 도래를 기다리였다.

기분 나는 웃음거리는 반우에서도 있었고 파서에도 있었다. 파서도 반우와 마찬가지로 장족동포마을로서 100여호의 장족초가집(茅草房)과 엄청 큰 라마묘(喇嘛庙)가 있었다. 로홍군인 양정화(杨定华)는 이 엄청이나 웅장한 라마묘를 상해의 챨스든영화관(查尔斯顿电影院)에 비기여 박장대소를 선물하였다. 라마묘에는 규모가 상당한 불상이 있고 불상의 좌우켠엔 각기 서로 포옹하는 남녀상이 보이였다. 양정화는 포옹하는 남녀상은 남녀량성(两性的热恋)의 뜨거운 사랑을 표현한다고 하여 또 한번 박장대소를 자아냈다.

이 이야기는 해리슨 솔즈버리의 《장정—전대미문의 이야기》 제26장에서 한 단락으로 나온다. 해리슨 솔즈버리는 이 단락글에서 이곳 라마묘를 사랑묘(爱情之庙)라고 하자 많은 홍군장병들이 라마묘에 들어와 불상과 남녀포옹상을 보았다고 밝히였다. 무정도 그 가운데의 한 홍군장병이였다고 상상해본다.

파서 라마묘에 대한 이야기는 로홍군 양정화(杨定华)가 쓴 “설산초지행군기” (雪山草地行军记)에서 먼저 나타난다. 양정화의 “설산초지행군기”는 지난 세기 30년대 중국공산당이 프랑스 빠리에서 꾸리는 《구국시보》 (救国时报)에 25기까지 련재되였다고 한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설산초지행군기”는 그 시절 렴신(廉臣, 즉 진운)이 쓴 “수군서행견문록”(随军西行见闻录), “감숙으로부터 산서까지”(由甘肃到山西) 등 2편과 더불어 20세기 30년대의 가장 귀중한 3편 장편장정회고실록이였다. 그런 회고록의 하나인 “설산초지행군기” 관련 회고문이 미국 기자이고 작가인 해리슨 솔즈버리의 글에 다시 실리고 중공중앙 당학교출판사에서 출판한 《만리장정경력기》에도 실렸다.

장국도와의 투쟁

우로군은 파서지억에서 모아개회의 결정에 따라 사천 아파지구로 진출한 좌로군을 기다리며 인차 떠나지 못하고있었다. 그런데 장국도는 1935년 9월 3일, 좌로군 선견부대인 5군이 묵와(墨洼) 부근에 이르게 되자 묵곡하(墨曲河, 噶曲河라고도 한다)가 물이 불고 초지를 통과하기 어렵다를 구실로 강압적으로 좌로군부대를 아파로 돌아서게 하였다. 그리고는 중공중앙에 전보를 날려 송번의 적을 타격하게 우로군을 돌리라, 좌로군도 식량을 준비한 다음 송번으로 진출하겠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장국도라는 이 사람은 점점 말이 아니였다. 날따라 극단적으로 번져갔다. 9월 9일 장국도는 북상방침을 개변시키기 위하여 남진주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하면서 중공중앙에 보낸 전보에서 천강변(川康边)으로의 남하는 절대로 독안에 든 쥐가 아니라고 극력 고취하였다. 같은 날, 중공중앙은 장국도에게 다시 전보를 띄우면서 당면의 방침은 북상만이 출로이다, 중앙은 절대 북상방침을 개변하지 않는다, 좌로군은 속히 북상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장국도는 아파지역이 어떠어떻게 좋다고 강조하다가 종내는 더러운 몰골을 드러내고말았다.

9월 9일 오전, 장국도는 우로군에 속한 자기의 심복인 진창호에게 밀전을 보내왔다. 그때 우로군 전적총지휘부 총지휘는 서향전이고 정치위원은 진창호였다. 도리대로라면 밀전은 진창호가 직접 번역하여 읽어야겠는데 진창호는 홍군부대에서 가진 정치회의에서 한창 보고에 열을 올리고있었다. 그러니 홍군전보원은 장국도에게서 온 전보를 우로군지휘부 참모장인 엽검영에게 넘기였다. 정직하기로 이름이 있는 엽검영은 전보문을 볼세라 회의장 진창호를 찾았다. 보고중인 진창호는 “기다리라. 내가 바삐 보내는걸 보지 못하는가”고 짜증을 내였다.

보매 전보는 급한 전보인것 같았다. 전보문을 피뜩 보게 된 엽검영은 놀랐다. 전보문의 내용이 밝혀지지 않아 전문을 알수가 없지만 대체로 우로군더러 방향을 돌려 다시 초지를 지나 4방면군과 회합하라는 내용이였다. 먼 후날 리선념은 전보문에는 “당내투쟁을 철저히 진행한다.”는 관건적인 말이 들어있었다고 하였다.

어찌하든 사정이 급했다. 엽검영은 변소행을 빌미로 100~200메터 떨어진 모택동주숙지로 달아가 전보문을 내놓았다. 모택동은 전보문을 한부 베껴낸 뒤 모택동이 보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당신 참 잘했소!”(你干得漂亮)라고 치하하였다. 지휘부로 돌아오니 진창호는 의연히 보고중이였고 엽검영은 아무 일도 없는듯이 전보문을 진창호의 비서에게 넘겼다. 그날 오후 진창호는 모택동을 만나 장국도의 명령을 전하였다. 모택동은 북상방침을 천명하며 설득하려 했지만 진창호에게는 먹혀들지가 않았다. 모택동은 기민하게 홍군부대의 행군로선을 개변하려면 반드시 중앙정치국을 거쳐야 한다면서 주은래와 왕가상이 홍3군단 사령부에서 병치료중이니 락보(洛甫,즉 장문천), 박고(博古)와 같이 그리로 가서 회의를 가져야겠다고 핑게를 대였다.

깜짝 속히운 진창호는 이를 묵과하고, 모택동은 파서 부근의 홍3군단 주둔지ㅡ아서 야눙채 주은래의 병실을 급급히 찾았다. 주은래의 병실은 아서 야눙채의 한 장족동포의 가옥ㅡ높다란 흙집 단층집에 자리하고있었다. 무정은 팽덕회의 지시대로 언녕 부대를 풀어 야눙채와 그 일대를 철통같이 지키도록 하였다. 그사이 모택동은 중앙정치국 긴급회의를 가지고 중앙홍군의 행군방향을 개변하지 않기로 하고 장국도에게 전보를 보내여 중공중앙의 북상결의를 집행할것을 요구하였다. 또 장국도의 돌변사태에 비추어 9월 9일 밤도와 파서와 아서를 비밀리에 떠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회의는 파서지역에 머무른 군위종대와 홍3군단 그리고 아계로 앞서간 홍1군단으로 림시북상선견대를 구성하기로 하고 우로군을 군위부주석 주은래가 지휘하기로 하였다.

사실 홍1방면군과 홍4방면군간의 내부상잔문제는 9월 9일 진창호에게 보내온 장국도의 전보를 받고 처음 떠오른 문제가 아니다. 팽덕회의 관련 회고에 의하면 팽덕회는 망망한 초지를 지나 파서지역에 이른 다음 모택동과 먼저 손써서 예방조치를 댈것을 제기하였다. 참모 무정과도 이 일을 안타까이 이야기한바가 있다. 9월 9일전이였다. 지금 모택동의 부대로는 홍3군단과 군위종대뿐이고 홍1군단은 2일 려정인 아계에 가 있다, 우리 부근에는 장국도의 2개 군이 있다는것이 팽덕회의 예방조치 제기근거였다.

“만일 4방면군이 우리 3군단의 총을 해제하련다면 어쩔텝니까? 아예 인질을 잡아 홍군대오내의 내부상잔 불행한 국면을 막아냅시다!”

“안되오. 아직 그럴 때가 아니요!”

팽덕회의 말을 모택동은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모택동은 홍군의 내부상잔을 바라지 않았고 장국도가 돌아서기를 피타게 기대하고있었다. 무정은 이 이야기를 너무도 잘 알았다. 하지만 장국도는 극단으로 나아가고있었다.

파서회의, 즉 아서회의 결의는 9월 2일부터 파서에서 가진 두차례 정치국회의 계속으로서 홍1방면군이 홍4방면군과의 무장충돌위험에서 벗어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과단한 조치였다. 파서회의(아서회의)는 중국공산당과 중국로농홍군의 전도와 운명에 관련되는 한차례 관건적인 회의로서 중국공산당력사에서 자못 중요한 력사적지위를 가지고있다. 그만큼 잊지 못할 1935년 9월 9일이다.

중국공산당 당사와 홍군사에 기록된 9월 9일, 이날 밤따라 내리던 비도 멎고 희뿌연 안개가 걷히면서 대지가 밝았다. 이날 밤따라 저 하늘의 달님이 유난히 밝고 별들이 반짝이였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후 양상곤이 회고하는 대자연의 밝은 달밤이다. 그러나 모택동이 느끼는 이날 밤은 유난히도 어두웠다. 중국인민의 위대한 수령 모택동은 1960년에 에드가 스노와 이야기를 나눌 때 그때는 “나 일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각이였다”고 말했다. 모택동은 이날 밤을 상기하면서 요지ㅡ내가 분투하여온 모든것을 이 짧디짧은 순간에 잃게 되는것 같고, 홍군장정이 중도에서 패배로 돌아가는것 같고, 날 밝기전에 홍군이 내부상잔(自相残杀)을 벌릴것 같았다고 담담히 터놓았다.

과연 1935년 9월 9일 이날 밤은 어떤 밤이였을가. 중국공산당 력사로 보는 이날 밤, 아니 이미 새날을 잡았으니 9월 10일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모택동 등 중앙수장들과 제3군단, 군위종대가 파서를 떠난 시간은 새날이 시작된 직후의 9월 10일 이른 새벽이였다. 홍군학교특과퇀 정위 송임궁의 회고에 따르면 군위종대 소속 홍군학교 특과퇀도 9월 10일 새벽 3시 쯤에 긴급북상명령을 받았다. 위국청, 송임궁, 양림 등은 재빨리 행동하여 전퇀 장병들을 집결시키고 북상명령을 전달하였으며 지체없이 파서를 떠나 홍1군단이 앞서간 감숙 아계로의 행군길에 올랐다. 9월 9일 자정후의 비밀행동이였다. 어떤 자료에서는 새벽 2시쯤이라고 하고 어떤 자료에서는 새벽 3시쯤이라고 한다.

이 비밀행동에서 엽검영과 양상곤이 가장 위험한 과업을 맡아나섰다. 1934년 10월, 중앙홍군이 장정을 시작할 때 엽검영은 군위 제1야전종대 사령원이고 1935년 1월 준의회의후 3월, 홍3군단 참모장으로, 초지를 지날 때에는 우로군총지휘부 참모장이였다. 양상곤은 장정길에서 줄곧 홍3군단 정치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35년 8월에 홍군총정치부 부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모택동이 이끄는 우로군을 따라 행동하고있었다. 9월 10일 이른 새벽의 행동시선을 전이시키고저 엽검영은 진창호를 찾아 홍1방면군측이 날이 밝으면 남하식량을 준비하기 위하여 청과맥준비에 나선다고 알리게 된다.

이날 밤을 두고 양상곤은 진창호가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하고 더구나 모택동이 감히 단독으로 움직이지 못할거로 알고있었다고 회고했다. 청과맥준비와 관련하여 양상곤은 우로군총정치부내 사람들이 될수록이면 식량준비에 나서는것으로 차리게 하였다. 새벽 2시를 앞두고 엽검영과 양상곤은 우로군총지휘부 경위반과 소속 2국(二局) 등 관련 인원들이 륙속 먼저 출발하게 하고 2시에 이르러 우로군총지휘부를 조용히 나섰다. 무정은 팽덕회군단장한테서 9월 9일 밤 이야기를 전해듣고 실로 아짜아짜한 순간이였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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