汉文版회원가입비밀번호찾기
연변일보 - 조선족을 알리는 창
 
주말엔   
겨레의 창 사랑한마당 기획련재 인물 • 인터뷰 약동하는 연변
 현재위치: 연변일보 >> 기획 >> 기획련재 >>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 민족의 전설, 항일장령 무정장군의 인생비화
민족의 전설, 항일장령 무정장군의 인생비화
리함
날짜  2016-12-19 8:13:07   조회  532

 

오늘의 감숙성 질부현 달라향 고길촌ㅡ아계회의가 열린 곳. (2011년 8월 1일 현지촬영)

아계회의 옛터 안내비. (2011년 8월 1일 현지촬영)

무정이 떠나서 하루이틀만에 과연 사태가 터지고 파서긴급회의가 열렸다. 이날이 1935년 9월 9일 밤 홍3군단의 주둔지 파서였으니 회의 끝남과 함께 산하 중앙종대와 홍3군단에 파서회의 결의가 조용히 전달되고 중앙군위 모택동 등은 중앙종대와 홍3군단을 이끌어 파서를 빠져나왔다. 그때의 파서와 아서에는 홍1군단이 아계로 앞서가다보니 중앙군위와 중앙종대, 홍3군단이 있을뿐이였다.

파서를 빠져나오는 이 시각, 팽덕회의 책임은 너무나도 중했다. 어찌 보면 그의 앞에는 우리 당과 우리 홍군의 생사존망이 펼쳐지고있었다. 원 중앙군위간부퇀이 중앙종대를 지켜섰다지만 강철같은 무적의 군위간부퇀이라 해도 1000여명의 대오에 불과했다. 팽덕회는 그날따라 중앙군위와 모택동 등 지도자들의 보위와 안전을 지켜선 자기의 책임이 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한 팽덕회이기에 그는 즉각 양용(杨勇)이 군단산하 홍10퇀을 거느리고 원 군위간부퇀과 더불어 중앙종대의 북상을 호위하도록 하고 군단 참모장 소경광(肖劲光)이 홍10퇀과 함께 행동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친히 산하 홍13퇀 퇀부를 찾아 퇀장 팽설풍과 정치위원 장애평에게 중앙의 결정을 전달하면서 13퇀 전체가 즉각 파서 골안에 진을 치면서 달려드는 일체 무력을 제압하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사천땅도 아닌 감숙땅 아계로 먼저 진출한 홍1군단은 무선전암호가 두절된데서 아무것도 모르고있었다. 9월 9일을 전후한 며칠사이 서로 모순되고 갈피를 잡을수 없는 전보 몇통을 받았을뿐이였다.

—9월 5일 20시, 진창호 전보: “우로군 7일간 정리계획” (右路军七天整理计划)이니 전보지령에는 “홍1군단이 그자리에서 휴식 정돈할것”이라고 밝혀져있었다.

—9월 6일 15시, 주(은래) 팽(덕회) 리(부춘) 전보: “1군단 주력은 응당 아계에 집결, 소부대를 라달(罗达)에 파견하여 정찰하면서 전진할것.”

—9월 7일 14시, 팽(덕회) 리(부춘) 전보: “내부 일이 복잡하니 1군단은 응당 그자리에서 휴식 정돈하면서 특별히 체력회복에 주의할것.”

여러 전보를 종합하여보면 “휴식정돈”(休整)이요, “전진”(前进)이요, “내부 일이 복잡”(内情复杂)하오, “체력회복에 주의”(注意恢复体力)하오 등이니 림표와 섭영진은 갈피를 잡을수가 없고 서뿔리 부대를 움직일수도 없었다. 사실 알고보면 이 며칠간의 전보는 모두 전적총지휘부에서 띄운것이였다. 그때 홍1군단과 홍3군단은 근본 서로 련락할수가 없어서 홍3군단부 참모 무정이 새로 만든 무선전암호를 가지고 밤낮없이 아계로 가고 또 가는 길이였다.

무정이 나아가는 길은 풀과 물들이 썩으며 고인 치명적인 독성을 가진 초지나 그 깊이를 알수 없는 풀뿌리 수렁길이 아니라 가고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두 산사이 깊은 골안길, 천고의 밀림속으로 사품치며 흐르는 골물사이 오솔길이였다. 한밤중 까딱하면 골물에 굴러떨어질수 있는 아짜아짜한 길인데 가끔 무서운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귀전을 때리여 머리가 곤두서기도 하였다. 다행히 팽덕회군단장이 전신무장한 끌끌한 한개 반 홍군전사들을 배치하여 주었으니 말이지 혼자라면 총을 지녔다 해도 시시각각 신경을 도사려야 할 위험천만한 길이였다.

그래도 가야만 하는 길이였다.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무작정 달려야만 하는 책임이 중대한 길이였다. 그렇게 밤낮 2주야를 가고가니 심산속 아계의 홍1군단 주둔지가 나타나는데 무정이 홍1군단 군단장 림표와 정치위원 섭영진에게 무선전암호를 넘기니 바로 파서긴급회의 시각과 맞아떨어진다.

하늘이 알아준다. 일이 될라니 마침 그 시각 파서에서 중앙정치국확대회의—파서회의가 열리였고 급해난 모택동은 안절부절 못하였다.

“로팽(老彭), 홍1군단과 련계하여야겠소.”

“로모(老毛), 시간으로 보면 무정동지가 아계에 도착할 시간도 되였구려.”

“그래, 무정, 참 믿을만한 사람이지.”

모택동은 중앙혁명근거지 시절 이미 무정을 만나 보았고 장정길에서도 자주 어울리는 무정이여서 고개를 끄떡였다. 모택동과 팽덕회 사이도 로팽, 로모하는 허물없는 전우사이였다. 1927년 10월, 모택동이 추수봉기 부대를 이끌고 정강산에 오른후 소속 홍군부대를 지휘하여 정강산에 올라 모택동의 부대와 회사한 첫 사람이 주덕이고 두번째로 정강산에 진출하여 회사한 사람이 팽덕회였다. 그들은 힘을 합쳐 홍4군을 이루었으니 그 전우정은 여간 깊지 않았다. 그런 모택동과 팽덕회라 모택동은 기쁜 나머지 즉각 홍1군단에 전보를 보내라면서 전보문을 친히 구술하였다. “행동방침에 변동이 있다. 홍1군단은 그 자리에서 휴식 정돈하면서 명령을 기다리라. 모택동(行动方针有变,你部在原地休整,待令。毛泽东。)”

그날 오후 5시, 홍3군단은 중앙종대와 더불어 라계(拉界)에 도착하여 홍1군단 주둔지 아계와 아직도 하루간의 거리를 두었다. 이때 홍3군단 군단장 팽덕회와 정치위원 리부춘(李富春)은 련명으로 홍1군단에 전보를 날렸다.

림, 섭:

장국도는 전략방침을 위반하면서 우로군에 남진을 명령하였다. 중앙에서는 이미 전보를 띄워 질책했다.

중앙에서는 오늘 3군 전부와 군위종대를 거느리고 라계에 도착하고 래일 아계에 도착한다.

라계에서 아계로의 거리, 연도형편, 급양조건이 어떠한지 알리라. 그리고 3군 전부와 군위종대의 숙영지를 마련해달라.

팽덕회 리부춘

9월 9일 17시 홍1군단 림표와 섭영진은 무정이 전한 무선전암호로 홍3군단 팽덕회와 리부춘이 보낸 전보를 번역하고서야 그사이 군위종대와 홍3군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게 되였다. 무정이 목숨으로 전한 팽덕회의 무선전암호가 없고 장국도의 밀령을 먼저 받았다면 그 후과는 어떠할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때에야 소스라치게 놀란 림표와 섭영진이 무정동지에게 심심히 경의를 표하고저 무정을 찾아보니 경위반을 데리고 밤낮 2주야 급행군을 강행한 무정은 너무도 피로한 나머지 벽에 기대여 코를 골며 세상 모르고 자고있었다.

무정과 그가 거느린 경위반은 사천땅을 넘어 감숙 경내로 진출한 세번째 홍군대오였다. 첫번째는 주은래와 팽덕회 등의 건의로 모택동이 파견한 양성무(杨成武)의 홍1군단 제4퇀 북상선견대이고 두번째는 9월 5일 림표, 섭영진이 거느린 홍1군단의 아계진출이였다.

운명을 가른 나날

무정이 비밀리에 파서에서 북상하여 홍1군단에 비밀암호를 전한 이야기를 나중에 미국작가 해리슨 솔즈버리가 《장정, 전대미문의 이야기》(长征,前所未闻的故事)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팽덕회의 옥중자술에 의하면 그때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두 홍군대오사이에 충돌이 일어날거라고 걱정들을 하였는데… 팽덕회는 제1군단과 련계가 끊어질가 걱정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때 가이드가 없었기에 제1군단은 로씨야변계(필자 주: 아계를 로씨야변계로 잘못 알고있었다.)부근에서 오도가도 못하고있었다. 비밀암호가 바뀌였기에 팽덕회는 그들과 련락을 할 수가 없어서 새 비밀암호를 만들어 믿음직스러운 조선공산당원 무정에게 맡겨 지남침까지 곁들어 주면서 림표, 섭영진과 련계하라고 하였다. 섭영진의 기억에는 그때 제1군단은 아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원 자리에서 명령을 기다리라는 전보만을 받았을뿐이였다.”

그러면서 미국작가 해리슨 솔즈버리는 무정은 팽덕회의 믿음을 한몸에 깊이 받고있는 “중국혁명에 몸을 사리지 않은 조선동지”임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쓰고있다.

그후 먼먼 후날에 그 시절 1군단 정위 섭영진은 “무정동지가 제때에 비밀암호를 보내지 않았으면 우리는 중앙 및 3군단과 련락을 가질수 없었을뿐만아니라 누구 명령을 들어야 할지도 몰랐을것”이라면서 그때의 1군단 상황을 알려주고있다. 그때 1군단은 이미 아계에 도착하여 우리는 상술한 정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있었다. 9월 10일에 3군단에서 띄운 한부의 전보를 받게 되였는데 우리더러 전진을 멈추라고 하였다. 그뒤 무정동지를 파견하여 편지를 보내서야 우리는 중앙의 위험한 처지를 알게 되였다. (주. 섭영진 회고, 만리장정경력기, 중공중앙당학교출판사, 2005년 1월 제2차 인쇄, 제84페지) 1935년 9월 9일 17시, 팽덕회와 리부춘의 전보를 받은 림표와 섭영진은 홍3군단에 답전을 보내며 물었다.

“당신들은 지금 어디에 이르렀는지. 형편이 어떠한지, 3군단외 또 어떤 부대가 오는지, 중앙의 지도자들은 모두 오는지, 알려주기 바란다.”

전보에서 림표와 섭영진은 또 팽덕회에게 한마디 더 적었다.

“우리는 2사와 직속대 일부를 앞부분의 아좌사(俄座寺)로 나가도록 하고 방을 내여 당신들에게 드린다.” 그리고는 군단산하 제1사 사장 류아루(刘亚楼)에게 전보를 보내면서 “주(덕), 장(국도)의 네시 전보는 당신과 정위외 누구에게도 흘리지 말라. 당면 당내론쟁은 이제 만나서 알리겠다”고 하였다. 1사 사장 류아루에게 보낸 전보에서의 네시는 장국도가 어제 9월 9일에 장국도 자기와 주덕의 명의로 홍1군단과 홍3군단 그리고 중앙지도자들에게 보낸 전보를 가리키는데 전보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중앙과 홍1군단, 홍3군단의 북상을 반대한다는것이였다. 1935년 9월 11일 17시, 위험에서 벗어난 모택동과 중앙지도자들은 홍3군단과 홍군학교 특과퇀의 호위속에서 드디여 감숙땅 질부(迭部)현 경내의 아계에 들어섰다. 홍3군단과 홍군학교 특과퇀도 륙속 아계지역에 이르러 감구(甘沟)와 아계, 달라구(达拉沟) 일대에서 홍1군단과 승리적으로 회사하였다. 중앙홍군속의 홍1군단과 홍3군단은 서로 헤여진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오랜만이런듯 서로 얼싸안고 돌아갔다. 두 영웅부대의 상봉은 육친의 정보다도 더 뜨거웠다.

팽덕회는 무정참모의 손을 부여잡고 대견스레 말했다.

“당신은 중국혁명의 관건시각에 대공을 세웠소. 자칫하면 홍군대오는 분렬이 생길번했지. 이 팽덕회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구만!”

무정의 가슴엔 세찬 격랑이 일었다. 심산속을 헤치며 홍1군단에 전한 무선전암호가 이렇듯 엄청날 분렬을 막았다는것이 스스로도 쉽게 믿어지질 않았다. 그는 자기가 중공중앙과 중앙군위와 홍1군단, 홍3군단을 이어주는 무선전련락에서 태산같이 중요한 역할을 놀았다는것을 뒤늦게 알게 되였다. 홍군장정길에서의 무정의 가장 빛나는 혁혁한 공헌이였다. 팽덕회군단장과 함께 장국도에게 휘둘리며 남하하게 될 중앙홍군을 효과적으로 막아낸 1등 공신이였다.

아계란 오늘의 감숙성 질부현소재지 동남 68킬로메터에 위치한 질부현 달라향 고길촌(迭部县达拉乡高吉村)을 가리킨다. 감숙 민산(岷山)의 협곡지대에 자리잡은 고길촌은 홍군시절에도 고길촌으로 불리는 마을이였는데 중앙홍군이 사천땅에서부터 데리고온 장족어통역이 고길(高吉)이라는 두 중문글자를 중문으로 아계(俄界)라고 읽은데서 아계에서 열린 정치국회의 기록을 맡은 동지가 회의지점을 그대로 아계라고 기록하여 아계회의로 력사에 남게 되였다. 고길이라는 고(高)자는 장족어로 산이라는 뜻이고 길(吉)자는 수자 팔(八)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고길촌은 말 그대로 질부 동남쪽에 있는 산간마을이다. 장족동포들로 이루어진 이 마을을 실제 통제하고있는 사람은 성이 양씨라는 토사(土司)였다. 양씨는 명조이래 제19대 토사로서 장족 성씨(藏名)로는 사씨(谢代)로 불리였다. 19대 토사의 조상인 제1대 토사 양씨가 14세기부터 명나라에 납공(纳贡)을 시작한 이래 고길촌을 망라한 이 지역은 줄곧 양씨네 자손들이 대대손손 관리해왔다.

제19대 토사에 이르러 토사 양씨는 국민당과 홍군에 대하여 일시동인하면서 중립을 지켰다. 이미 국민당당국에 소금이나 량식 등을 바치던 양씨는 홍군대오가 들어서자 주저없이 량식창고를 열어주었다. 무정은 홍3군단의 식량분배를 통일적으로 관리하여 나섰다. 어떠한 서면협정이나 수속도 가지지 않아 아주 감사한 일이였다. 홍군대오는 양씨에게 일부 보총을 넘겨주었다. 먼 후날의 일이지만 혁명이 승리한후 중국공산당은 양씨네를 혁명의 대상이 아닌 인민의 부류로 인정하여주었으며 1984년에 56세의 제20대 토사를 감숙성 인대 부주임으로 등용하였다. 20세 때 이 20대 토사는 국민당에 의해 중장으로 부임되기도 하였지만 중국공산당은 홍군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잊지 않았다.

홍군에 의해 아계로 불리운 이곳 고길촌과 이 일대를 관리하는 제19대 토사와 제20대 토사 이야기였다. 지금도 이 지역으로 가면 관련 자료는 물론 장족동포들로부터 양씨네 제19대와 제20대 토사 관련 이야기, 파서와 아계에 깃든 홍군이야기를 들을수 있다.

QR코드를 스캔하여 위챗 모멘트에 공유하여주십시오.
저작권성명: 본 사이트 기사를 전재하실 경우에는 연변일보 사명과
기사 작성자명(기자명)을 반드시 표기하여주십시오.
댓글쓰기 글자수 제한 (200/자)
 많이 본 뉴스
  “우리 민족문화 한마당”행사 북경서
  진지한 작품의식, 음악계 “수놓이군”
  새 시대 청년, 전통떡에 새옷 입히다
  조선족들 진정한 “우리 집”으로
  작지만 강한 기업, 우리 손으로 만든다
  “라이트 세븐”, 조선족청년의 도전
  무용대 설립해 민족문화 전파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외롭지 않아
  “장애인을 가족처럼 살뜰히...”
  상해를 주름잡는 “열정의 사나이”
 약동하는 연변
  •  화룡 농촌학교건설에 대규모 투자
  •  돈화 년초 계획한 10가지 민생공사 전부 수
  •  “훌륭한 시설 덕에 촌에서 병 보입니다”
  •  련합테스트 고속렬차 훈춘에 들어서
  •  연길 조양오수처리공장 사용에 투입
  •  도시농촌건설사업 개혁템포를 전면 다그치
  •  연길모드모아휴가촌 캠핑카캠프장 건설
  •  “시골마을 정취에 취해보세유...”
 
연변일보  |  리용약관  |  제휴제안  |  기사제보  |  광고신청  |  구독주문  |  오시는 길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Tel: +86-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吉ICP备09000490号 본 사이트 모든 기사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