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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전설, 항일장령 무정장군의 인생비화
리함
날짜  2016-12-26 7:48:21   조회  561

 

장정도중 천험 랍자구전역 기념비.(2011년 8월 1일 현지 촬영)

 

모택동이 이끄는 중앙모택동이 이끄는 홍군섬감지대는 1935년 9월 17일 이른 새벽 절벽강산으로 이루어진 천험 랍자구를 공략했다.(2011년 8월 1일 현지 촬영)
종대와 홍3군단이 홍1군단과 회합한 그날 밤(9월 11일) 중공중앙은 기정 북상방침을 시달하고저 장국도에게 다시 전보령을 내렸다. 전보령은 “즉시 좌로군을 거느리고 반우, 파서로 진군하라. 이를 위반해서는 안된다.”(立刻率左路军向班佑、巴西开进,不得违误)고 지시하면서 중앙은 이미 우로군을 군위부주석 주은래동지가 통일적으로 지휘하기로 하였다. 1군단, 3군단에 이미 명령하여 라달(罗达), 아계에 집중하도록 명령하였다고 알리였다.

그러나 장국도는 재차 중앙의 명령을 거역하면서 9월 12일, 1방면군 홍1군단과 홍3군단에 전보를 보내여 1, 3군단의 단독 북상은 “지경이 보이지 않는 도망”(无止境的逃跑)으로 될것이며 장래 후회하여도 쓸모가 없을것이라고 비난했다. 또 “지쳐 죽지 않으면 얼어 죽게 될것” (不拖死也会冻死)이라면서 1군단과 3군단이 같이 남하하여 “사천을 적화시키자”, “사천은 우리의 근거지”라고 떠벌렸다. 장국도는 또 원 4방면군의 우로군 제4군, 제30군을 남하하라고 전보령을 내렸다. 9월 11일 밤부터 12일까지 당중앙은 감숙 아계에서 또 우로군중앙정치국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장국도의 분렬주의를 적발하고 비판하며 앞으로 행동방침을 확정하기 위한 회의였다.

아계회의에는 팽덕회도 참가하였다. 회의참석자들은 장국도의 우경분렬주의 행동에 대해 지명비판을 하면서 지대한 분개를 나타냈고 당적을 취소하자고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동의하지 않았다. 장국도와의 투쟁은 두갈래 로선과의 투쟁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결론을 내릴 때가 아니다. 장국도와의 관계는 그 한 개인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4방면군의 간부들을 단결하고 쟁취하며 4방면군과 함께 활동하는 그곳의 1방면군 간부들의 안전을 지키는것과 련관된다. 당신이 그의 당적을 없애면 그는 몇만의 군대를 통솔하는 사람으로서 몇만의 군대를 기편할수 있는데 그러면 이후 만나기 어렵다. 이런것이 모택동이 동의하지 않는 주요한 리유들이였다.

회의참석자들은 사리정연한 모택동의 의견과 회의보고를 일치하게 동의하면서 장국도에 대해 잠시 조직결론을 내리지 말고 1, 3군단내에서 설복해석을 강화하기로 결의하면서 “장국도동지의 오유에 대한 결정”을 통과하였다. 회의는 북상과 근거지 건립문제를 토의하고 부대편제를 축소할데 관한 팽덕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1, 3 군단 북상부대를 중국로농홍군 섬감지대로 축소편성하였다. 섬감지대는 팽덕회를 사령원으로, 림표를 부사령원으로, 모택동을 정치위원으로, 왕가상을 정치부 주임으로, 양상곤을 부주임으로 하고 모택동, 주은래, 왕가상(王稼祥), 팽덕회, 림표 등 5인단을 설립하여 전군의 최고지도핵심으로 하였다. 아계회의를 두고 팽덕회는 후날 “모주석은 장국도와의 투쟁가운데서 고도의 원칙성과 령활성을 표현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아계회의를 마친 이튿날 동틀무렵,당중앙과 중앙군위는 아계주둔지 부근의 삼림속에서 전문 홍군회의를 가졌다. 무정소속 홍3군단과 양림소속 홍군학교 특과퇀의 장병들도 회의장에 집결하였다. 모택동, 주은래, 장문천, 박고, 등발, 리덕 등 지도자들이 회의에 참석하고 모택동이 중요연설을 했다.

모택동은 연설에서 우리는 금방 한차례 중요한 회의를 열어 장국도의 도망주의와 당을 분렬하고 홍군을 분렬하려는 죄악적 음모를 적발비판하였으며 우리의 홍군은 계속 북상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하면서 표면상으로는 우리의 인수가 줄어들었지만 질적으로 보면 단련을 받은것이 더욱 견강하여졌다고 말하였다. 모택동은 계속하여 당을 분렬하고 홍군을 분렬하는 장국도의 죄악적 목적은 이루어질수가 없고 좋은 결과가 있을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앞으로 그들은 꼭 돌아올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선견대가 되여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야 한다, 그들의 앞으로 북상을 위해 길을 잘 닦아야 한다, 우리는 긴밀히 단결하여 갖가지 곤난과 투쟁하자, 승리는 꼭 우리 당이 지도하는 영용한 홍군에 속한다고 힘줘 말했다.

모택동의 연설은 현실을 정시하고 희망으로 넘치였다. 전체 홍군대오와 더불어 홍3군단 무정은 지대한 고무를 받았다. 1935년 6월 사천땅 량하구회의로부터 두달 남짓한 기간 무정은 홍3군단 군단참모로서 군단장 팽덕회의 지시대로 비밀리에 장국도의 일거일동에 주의를 돌리면서 경계하면서 싸워온 과정을 돌이키면서 장정길 중앙홍군에서의 책임을 보다 깊이 느꼈다. 무정은 모택동과 당중앙, 중앙군위의 절대적 안전과 보위는 중국혁명의 성패와 련관되는 가장 선차적인 과업이며 모택동을 따르면 중국혁명이 승리할수 있다는 신심을 보다 굳혔다.

후날 무정은 팽덕회군단장에게 아계회의 과정을 상세히 듣고 심히 고무되였다. 부대편제를 축소하자는 팽덕회의 건의도 적시적이고 실제적이였다. 축소편성원인은 장국도의 4방면군에 비해 중앙홍군이라 불리우는 홍1방면군은 병력차이가 너무 크기때문이였다. 무정은 4방면군에는 홍군대오를 우로군과 좌로군으로 나누면서 중앙홍군의 5군단과 9군단이 편입되여 실력이 보다 강화되였음을 깊이 느끼면서 장국도와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음을 피부로 절감하였다. 9월 13일, 중공중앙은 섬감지대의 7000~8000명 대오를 인솔하여 아계를 떠나 민산(岷山)의 요새지 랍자구(腊子口)쪽으로 진군하였다. 섬감지대의 주체는 무정소속 원 홍3군단과 양림소속 군의종대, 원 홍1군단이였다. 랍자구 진군도중인 9월 14일, 중공중앙은 장국도에게 다시 전보를 보냈다. 전보에서 중공중앙은 홍1군단과 홍3군단으로 섬감지대를 구성하여 북상함은 당의 북상항일의 전략방침을 실현하면서 섬감지대의 간고분투로 좌로군과 우로군의 제4군, 제30군을 위해 길을 개척하며 당신들의 북상에 편토록 하기 위해서라고 천명하였다. 중앙은 장국도가 오유를 시정하고 소속 홍군부대를 이끌어 북상하기를 바라고있었다.

그 시절의 장국도는 완고통이여도 보통 완고통이 아니였다. 머리가 돌아버린 장국도는 9월 14일, 우로군의 제4군과 제30군이 자기의 명령대로 반우, 포좌(包座) 등지에서 다시 남하하면서 초지에 들어섰는데도 만족하지 않고 9월 15일, 사천 아파(阿坝)에서 “천강성위확대회의” (川康省委扩大会议)를 열고 중공중앙의 북상항일방침을 “기회주의”와 “우경도망주의”라고 욕설을 퍼부어댔다. 자기가 주장하는 남하는 “진공로선”으로서 “투쟁과 교육을 거쳐도 돌아서지 않는 분자”들은 “규률제재”를 받아야 한다고 력설하기도 하였다. 회의에서 장국도는 또 일부 사람들을 선동하여 돌연습격의 방식으로 주덕과 류백승을 핍박하면서 중앙의 북상방침을 반대하라고 무리하게 놀아댔다. 주덕과 류백승은 그자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북상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같은 날 장국도는 “대거남진정치보장계획”(大举南进政治保障计划)을 반포하면서 “당면의 전략방침은 주력을 집중하여 남으로 대거진공하면서 사천의 적 잔여부대를 소멸하는것”으로써 “선참 사천을 적화하여야 한다”(首先赤化四川)고 제기하였다. 9월 17일에는 또 남하명령을 내리였다.

장국도가 이같이 남하론을 주창할 때 모택동이 이끄는 홍군섬감지대는 9월 17일 이른새벽에 천험 랍자구(腊子口)를 공략하여 섬북으로 진군하는 길을 열어젖혔다. 9월 18일에는 16일 섬북근거지에 도착한 홍25군이 섬북홍군의 제26군, 제27군과 승리적으로 회합하였다. 이제 뒤에서 보다 자상히 언급하지만 9월 20일, 섬감지대는 감숙 민현의 하달포(哈达铺)에 진주하게 된다. 하달포에서의 휴식정돈을 거친 뒤에는 9월 23일 하달포를 떠나 장정길 최후인 섬북으로의 진군로에 오르게 된다.

장국도의 남하는 도도히 발전하여가는 모택동의 북상을 막을수가 없었다. 모택동은 일대 위인이였다. 팽덕회도 위인이였다. 무정은 팽덕회사령원을 받들어 모택동의 로선을 실천하여가는 이 길에 중국혁명의 승리가 있고 조선혁명의 래일의 가까와온다고 보고있었다. 무정의 섬북진군길은 섬북으로 향하는 길이였고 나서 자란 조국과 날따라 가까와지는 혁명의 길이였다.

무정의 발자취 따라서

2011년 7월 31일, 아파장족챵족자치주 수부 마얼캉(马尔康)을 떠나 홍군장정 초지길 답사를 이어갔다. 마얼캉에서 흑수(黑水,즉 로화)쪽으로 움직이다가 북상하면서 무정, 양림 소속 중앙홍군이 지난 모아개(毛尔盖)를 찾고 누얼까이현(诺尔盖县)가까이 파서를 찾으려 했는데 흑수쪽으로 달리는 뻐스가 없다. 너무도 맹랑하여 서성이다가 가야만 할 초지답사기에 마얼캉~홍원행 뻐스를 잡았다. 마얼캉~홍원행은 187킬로메터라지만 홍원대초원으로 알려지는 홍원현 경내도 홍군장정의 유적들이 있다고 한다.

오전 8시 10분 마얼캉을 출발한 장거리뻐스는 반시간 내내 좁은 협곡지대를 달리다가 마얼캉에서 91킬로메터 되는 곳에서 흑수현과의 갈림길을 스쳐지난다. 홍원대초원을 일컫은 초원지대는 흑수와의 갈림길 그곳부터 산과 산 사이 평지로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해발 4335메터를 알리며 202킬로메터 도로표식이 있는 홍원현 경내의 높은 산령부터 135킬로메터 도로표식이 있는 홍원현성까지 70킬로메터 내내 대초원으로 되여있다.

두 산, 두 언덕 사이 대초원의 폭은 짧게는 몇킬로메터로부터 넓게는 10여킬로메터, 20여킬로메터는 잘되는것 같다. 처음 일정 구간 대초원에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동네가 별반 보이지 않고 방목에 나선 장족포들이 가끔 나타난다. 홍원현성쪽으로 가면서부터는 농촌 향진들이 또 가끔 나타나 이곳 대초원도 사람 사는 고장임을 알린다. 따라서 대초원 곳곳마다에는 많고많은 검은 모우나 말, 양들이 무리를 지어 풀을 뜯는다. 날씨는 흐리멍텅하고 때때로 비가 내리며 안개가 자주 끼는 인상을 안겨준다.

뻐스는 옹근 4시간을 달려 마얼캉에서 187킬로메터 떨어진 홍원현성에 이르렀다. 보매 홍원현성은 그닥 크지 않은 하나의 초원현성이였다. 대초원의 한 구간이여서 넓고 평탄한 벌에 위치했으나 홍원현성에서는 하늘을 떠이고 일떠선 고층건물 하나 볼수 없었고 모두가 2~3층의 건물들이고 4~5층의 건물들은 보이긴 해도 많지는 않았다. 하나같이 일매진 그 건물모습들이 오히려 대초원 실제와 어울리며 보기가 좋았다. 현성의 거리거리들도 모두 깨끗하여 인상적이기만 하다.

홍원은 사천성 서북북 아파장족챵족자치주의 중부에 자리하고 장족동포들이 모여사는 순수 목축현성이다. 이전, 더우기 1936년 7월 홍2방면군과 홍4방면군이 이 고장을 지날 때만 해도 이곳에는 홍원이라는 고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해방후 이 고장은 끊임없는 개간과 건설, 발전으로 하여 현성을 앉힐만한 조건을 구비했다. 당년 홍군장정의 이곳 경과와 광활한 초원의 개간, 건설을 기념하기 위하여 1960년에 국무원에서는 이곳을 홍원현으로 정식 명명하였다. (주. 사천관광, 광동관광출판사, 2010년 1월 출판, 제66페지) 홍원이라는 이름은 주은래총리가 손수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 이름에 따라 사천 서북부 3대 초원의 하나인 이 고장과 그 일대 초원들을 하나로 통칭하여 홍원대초원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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