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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전설, 항일 장령 무정 장군의 인생비화
리함
날짜  2017-9-11 8:10:23   조회  209

“나 같으면 연안까지 업고 가겠다.”

긴장한 행군길에서도 랑만이 넘치고 유머가 넘쳐난다. 조선의용군의 문예일군들은 려로의 피로도 마다하지않고 늘 콰이발을 엮어대며 길옆에서 대오의 전진을 고무한다. 행군길에 오른 첫 두달은 그렇게 웃고 떠들며 행진곡도 곧잘 불렀다.

그러나 그 뒤는 모진 피로 속에 노래소리, 웃음소리 점점 줄어만 들었다. 끝없이 밤행군만 이어가니 힘에 부치고 배가 고프고 잠이 모자란다. 날 밝을 무렵은 더욱 어려워 적잖은 사람들은 비칠거렸다. 걸으면서 졸기가 일쑤였다. 두 다리는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적의 봉쇄선을 넘을 때 팔로군총지휘는 불필요한 위험을 피하고저 부대마다 교대로 매복하며 대부대의 통과를 보위하라는 명령을 내리였다. 그러면서도 조선 동지들에게는 경비과업을 맡기지 않았다. 그런 관심 속에서 조선의용군 부대는 선후하여 적의 봉쇄선을 세번 넘어섰다. 한번은 날이 밝아서야 아군을 발견한 적들이 뒤늦게야 박격포를 몇발 쏘아대고는 그만두어버렸다.

출발명령은 떨어졌지만 자리에 주저앉은 사람들은 쉽게 일어나지 못하였다. 리화림도 허리가 너무 아파서 일어날 수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때 조선의용군의 활약가인 정률성이 돌아가며 “연안에 다 왔으니 어서 일어나세요.”하면서 일으켜주었다. 새로운 행군은 다시 시작되였다.

첫패의 동지들이 떠나간 후

조선의용군 첫패의 동지들이 태항산을 떠나 연안으로 갔지만 태항산에는 그래도 무정을 선두로 하는 적지 않은 동지들이 남게 되였다. 무정은 조선의용군 사령원이기도 하고 생산총지휘이기도 하였다. 그는 남니만개간에서 여러 기업경영을 하여본 실천경험을 바탕으로 1943년 3월 이후 대중병원과 더불어 하남점에 상점, 방직공장, 타면공장, 리발소, 상품창고, 운수대 등 조선의용군의 기업들을 륙속 일떠세웠다. 근거지인민들과 팔로군부대의 부담을 덜기 위한 자력갱생의 길이였다.

무정이 직접 꾸린 상점은 3.1상점이라는 이름으로 자금 2000원 투자로 1943년 3월에 꾸려졌다. 1941년에 대후방에서 온 책임자 신태식(申泰植)과 그외 네 사람도 모두 조선사람들이였다. 상점은 식량, 식염, 비누, 성냥 등을 경영하면서 매달 10만원 좌우의 수입을 올리였다. 상점동지들은 모두가 힘을 합쳐 군중관계에 주의를 돌리면서 조선과 중국의 명절 때마다 물건을 싸게 팔고 항일에 나선 군인가족과 생활이 어려운 주민들에게는 집에까지 가져다주었다. 그들을 도와 마당도 쓸고 물도 길어주었다.

무정은 ‘1944년 1월부터 1945년 5월까지 화북조선독립동맹 사업경과보고’(1945년 5월 9일)에서 3.1상점의 운영성과를 실사구시적으로 높이 긍정하면서도 대중병원의 결함지적에 이어 3.1 상점의 결함도 운운하면서 상점의 동지들이 경각심이 따르지 못하여 적특무기관에서 파견한 밀정 김평(金平)이 돈 2만원을 훔치고 달아난 결과를 빚어냈다고 지적하였다. 무정은 또 1944년에 물가가 떨어질 때 시장시세에 주의하지 않아서 17만여원의 경제손실을 보기도 하였다고 사실대로 밝히였다. 무정은 계속하여 밀정 김평은 이미 연안에 압송되고 상점에서는 두차례의 손실을 보상하려고 하였으나 완전보상 목적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1945년 이른봄, 무정은 3.1상점을 통해 조선의용군과 태항산근거지 백성들의 소금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적구로부터 소금을 구해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중국어와 일본어에 익숙한 전사들이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가장하여서는 적구에서 소금을 사서 근거지내 양읍(阳邑)까지 운반하였다. 그러면 이번에는 다른 전사들이 패를 나누어 하루에 왕복 40킬로메터 길을 걸으며 양읍에서 20킬로메터 떨어진 편점(偏殿)까지, 편점에서 다시 조선의용군의 ‘3.1’상점이 있는 하남점까지 등짐으로 지고왔다.

하남점과 그 일대는 우리 태항산근거지의 중대지대의 하나여서 조선의용군은 신분을 속일 필요가 없었다. 소금운반대 전사들은 하남점에서 편점까지 빈몸으로 갈 때면 연도의 백성들에게 항일선전을 일과로 내세웠는데 그때면 중국어를 잘하는 전사가 주동이 되여 그 지방 민요곡에 가사를 맞춘 노래선전에 열을 올리였다.

你们是哪一国人啊?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我们是朝鲜人

鬼子侵略我家乡耶

(우리는 조선사람

왜놈들 우리 고향 침략했다네)

来到中国参加抗日

(중국에 와 항일에 참가했다네)

为什么背盐呢?

(어째서 소금은 지는가?)

盐背到根据地耶

(소금을 근거지에 메여온다네)

支援给抗日大家

(항일인민을 지원한다네)

그때마다 소금운반대 전사들은 노래에 따라 간단한 춤도 추어 효과가 좋았다. 며칠이 지나자 가는 곳마다 조무래기들이 따라다니며 노래를 따라 불렀고 마을어구마다 마을사람들이 나타나 더운 물을 권하군 하였다. 한데서 소금운반대는 열흘에 5000킬로그람 소금운반 계획을 사흘이나 앞당겨 완수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방직공장(纺纱厂)은 3.1방직공장이라고 불렀다. 한청회고록—《한청항일혁명회상록》에서는 방직공장의 설립을 1943년 3월 1일이라고 적고 있지만 무정의 ‘1944년 1월부터 1945년 5월까지 화북 조선독립동맹 사업경과보고’(1945년 5월 9일)에서는 1945년 3월 1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1943년 9월 이후 조선의용군에 입대한 리섭도 <태항산에서의 자급자족>이란 한편의 회고문 《중국의 광활한 대지 우에서》(1987년 8월 출판)에서 태항산에서 활동하던 조선동지들이 연안으로 떠난 후라고 사실 대로 적어 3.1방직공장의 설립은 1943년이 아니라고 1987년에 이미 밝힌 바가 있다.

리섭의 회고문을 보면 1944년 여름 밀가을을 끝내자 조선의용군총부에서는 관련 장병들을 조직하여 연안에 새로 설립될 조선혁명군정학교로 보낼 준비를 다그치고 있었다. 태항산근거지에 들어온 지 한해도 되지 않은 리섭 신입대원은 연안으로 가고 싶어서 무정 사령원을 찾으려던 참인데 마침 무정 사령원이 부른다는 전갈을 받았다. 리섭이 종주먹을 쥐고 무정 사령원이 거처하는 하남점 뒤쪽 언덕 움집으로 가니 무정은 반가이 맞아주면서 자애로운 어조로 말했다.

“리섭 동무! 동무는 후에 가오. 지금은 동무가 맡아해야 할 간고한 과업이 있소.”

간고한 과업이라고 하니 리섭은 대번에 적후공작을 떠올렸는데 그게 아니였다.

“동무가 보다싶이 지금 중국인민은 겨떡을 먹으면서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주고 있소. 우리는 자기의 조국을 일본침략자에게 빼앗기고 수천리 타국에 와서 중국인민의 신세를 지고 있소. 그러니 우리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자력갱생해서 그들의 부담을 다소라도 덜어주어야 하지 않겠소. 그래서 ‘대중병원’과 ‘3.1상점’을 우리 손으로 꾸린 것이요. 이번엔 방직공장을 하나 꾸려서 우리들의 군복을 다소라도 해결하자고 그러오.”

무정 사령원의 말은 너무도 조리가 있는 말이여서 리섭은 연안에 보내달라는 떼질을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기와 방직공장은 관계가 없다고만 보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결정이 내려졌다.

“방직공장을 꾸리자면 먼저 준비처를 내와야겠소. 준비처는 조직해주겠으니 동무가 주임책임을 맡소.”

아름찬 과업이라 리섭이 대답도 못하고 묵묵히 앉아있으니 무정 사령원이 다시 말을 걸어온다.

“어째서 대답이 없소, 응?”

“방직공장을 꾸리는 건 좋은 일이지만 방직기가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르는 제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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