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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전설, 항일 장령 무정 장군의 인생비화
리함
날짜  2017-9-18 8:08:13   조회  187

“동문 그전에 혁명을 배운 일이 있었소? 혁명같이 큰일도 하면서 배우는데 조그마한 베틀인 방직기와 물레를 만드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소? 3.1상점 주임인 신태식(申泰植) 동무에게 말했으니 그가 도와줄거요. 그리고 쏘푸에는 팔로군 후근부에서 경영하는 방직공장이 있으니 그 곳의 리광이라는 조선동무를 찾아가서 배워오도록 하오.”

리섭은 이렇게 방직기도 모르면서 어정쩡 방직공장 책임을 짊어지게 되였다. 무정사령원의 말씀대로 쏘푸(小铺)로 가서 리광(李光)을 찾아 그의 안내로 그곳의 방직공장을 돌아보니 방직공장의 기계라는 방사기와 방직기는 모두 목제품이였다. 목재가 있고 한다하는 목수가 있으면 만들어낼 것 같았다. 돌아와서 무정 사령원을 찾아 회보하니 그리도 기뻐하면서 신태식 동무를 찾으라고 하였다. 이번에는 신태식을 만나니 맘에 드는 목수는 물색했으나 재목이 문제라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해요? 주변의 산들이라야 돌산이여서 낫나무들밖에 자라지 못하는데.”

리섭이 울상을 하니 신태식도 뾰죽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했다. 떠오르는 재목도 로인들 집에 마련된 관널들 뿐이니 더욱 그러했다. 둘은 얼굴을 맞대고 있다가 촌정부를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어느 날 리섭은 혼자서 서쪽으로 12킬로메터 떨어진 팔로군 129사 주둔지 적암촌(赤岩村)으로 가 촌장을 찾았다. 촌장은 도리머리를 젓다가 한 집으로 안내하였다. 그 집의 젊은이를 통해 나이 지숙한 그의 아버지를 만나니 로인은 항일의식이 튼 분이였다.

“조선동지들이 제 나라를 떠나 이런 산골에까지 와서 중국의 항전을 돕고 있는데 그까짓 관널이 다 무어겠소. 항전에 필요하다면 내다 써야지.”

로인은 두말이 없었다. 로인은 손수 자기 집 관널을 내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네로인들까지 내세웠다. 리섭은 생각 밖으로 관널 다섯감을 쉽사리 사게 되였다. 근거지의 인민들은 바로 이런 인민들이였다.

재목이 해결되고 목수가 나서니 베틀 3대가 먼저 만들어졌다. 성능이 좋아 베틀 3대는 연안으로 옮겨졌다. 리섭 등은 련속작전으로 방사기와 방직기 4대를 만들어냈다. 타면기의 동력은 당나귀를 리용하였다. 공장설비도 갖추어지고 남자들은 방사기를 돌리여 실을 뽑아냈다. 군정학교에서 온 조선인 녀성 10여명은 부지런히 베를 짜냈다.

무정은 자기들 방직공장을 두고 ‘1944년 1월부터 1945년 5월까지 화북조선독립동맹 사업경과보고’(1945년 5월 9일)에서 방직공장은 자금 15만원을 투입하여 세웠다면서 공장이 정식 가동하기 전에 전문인원 다섯을 변구 관련 공장에 보내여 석달 동안 방적과 방직법을 배우게 하는 한편 근거지에서 설비를 갖추며 준비사업을 다그쳤다고 말하고 있다.

무정의 사업경과보고를 보면 방직공장은 방직기 5대와 직포기 3대로 일정규모를 갖추었다. 7월에 이르러서는 방적기가 18~20대로 늘어났다. 생산을 시작할 때 하루 인당 좋은 실은 두근 석냥, 무명은 10~20자를 생산했으나 로동자들의 기술수준이 오르면서 생산량이 늘어났다. 하반기에는 인당 작은 기계 2대와 큰 기계 1대를 다루게 되였다. 하기에 무정은 1945년 이해로 내의 자급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다음해부터는 군복 전부를 자체로 해결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공장 로동자는 청일색의 조선인 30명으로 구성되였다. 그중 숙련공이 10명이고 공장장은 공산당원 홍림(洪林)이 맡았다. 로동자 대부분은 나이가 지숙한 사람들이 아니면 허약자, 환자, 장애인 등 동지들이였다. 방적일을 해본 적이 있는 자원녀성들도 있었다. 결과 태항산의 조선의용군은 일매지게 자기들 수공 방직공장에서 생산하는 무명으로 지은 군복을 입게 되였다.

군복문제에서도 근거지인민들의 부담을 다소라도 덜겠다는 무정의 결심은 현실로 되였다.

하남점에는 또 리발소, 타면공장(弹花厂), 상품창고(货栈), 운수대 등이 일어섰다. 무정은 상기 ‘1944년 1월부터 1945년 5월까지 화북조선독립동맹 사업경과보고’(1945년 5월 9일)에서 리발소는 1943년 4월에 자금 700원을 투입하여 ‘태항리발소’ 간판을 내걸었다고 하였다. 리발사는 한사람 뿐이지만 월수입은 1000원 좌우였다. 타면공장 2개는 방직공장에서 직접 관리하였는데 1945년 3월 1일에 세워졌다. 두 공장은 각기 7만원을 투입하고 적점령구에서 구입한 기계 한대씩 가지고있었다. 조선인으로 이루어진 두 공장의 로동자 6명은 방직공장의 솜을 타면서 주민들의 솜도 타주었다. 주민들을 대상할 때는 시장가보다 낮게 받았지만 월수입은 만원 좌우로 경영이 술술 풀리였다.

무정은 사업경과보고에서 상품창고는 1944년 12월에 자금 10만원, 조선인로동자 10명으로 시작되였다고 적고 있다. 상품창고 동지들은 근거지의 지방특산물을 점점령구에 가져다 팔고 근거지에 필요한 약품, 식염 등 일용품을 구해 들이였다. 장사하는 과정에 적점령구의 지하조직과 련락도 하면서 선전물을 비밀리에 실어가는 과업도 맡아나섰다. 월수입은 10만원 좌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은 일도 생기였다. 1945년 2월 10일, 상품창고의 최공하(崔功何)가 상품을 구입하러 순덕(顺德)으로 갔다가 거리에서 전에 북경시절 알게 된 한 사람을 만나게 되였다. 최공하는 그 사람을 안다는 리유로 아무 의심도 가지지 않고 오후까지 술을 마시였다. 그 사람이 틈을 타서 헌병대에 밀고하였다. 헌병대는 최공하를 체포하여 석가장에 넘기였다. 밀고한 자는 헌병대의 통역이였다. 무정은 경각성을 잃은 결과가 이러하다고 지적하면서 그 후 적들은 얼마 안되여 최공하 동무를 석방하였다고 썼다. 다시 조선의용군으로 돌아왔는지는 사업경과보고에서 밝히지 않았다.

무정은 조선의용군 운수대 설립은 1945년 3월 8일, 노새 6마리로 힘찬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사업경과보고에서 밝히였다. 사업경과보고는 운수대의 수입이 좋아 다음달 4월말까지 벌써 1만 3000여원을 벌었다고 하였다. 운수대의 동지들이 서로 뭉쳐 돌아갔기에 별다른 일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였다.

조선의용군의 분맹사업

무정은 생존과 투쟁을 위한 기업경영을 억세게 틀어쥐면서 선차적인 사업이 적점령구를 통한 조선독립동맹과 분맹, 조선의용군의 대적공작임을 잊지 않았다. 1944년초 이후 무정은 전방 팔로군총부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 적점령구에 대한 조직사업을 새로 억세게 내밀었다. 우선 태항산에 남은 5명 간부와 7명 사업일군으로 새로운 지도부를 무었는데 그 조직형태는 아래와 같다.

상기 무정의 사업경과보고에 따르면 태항산근거지의 조선독립동맹은 적점령구내 조직으로 조직, 선전, 경리 등 3개 부문을 두었다. 조직부장은 리유민(李维民)이 맡고 아래에 조직, 적점령구, 통신련락 3개 과를 두었다. 김영숙(金英淑)이 조직과장으로, 고봉기(高逢基)가 적점령구와 통신련락 과장으로 부임하였다. 선전부장은 김창만(金昌满)이 맡고 아래에 선전과 자료 2개 과를 두었다. 양계(杨界)가 선전과장으로, 박무(朴茂)가 자료과장으로 부임하였다. 홍림(洪林)이 경리부 대리부장을 맡고 생산과 공급 두가지 과업을 틀어쥐였다.

조직시달에 이어 무정은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간부와 사업일군들에 대한 학습과 훈련을 강화하였다고 하였다. 태항산에 남은 조선동지들은 무정의 지도하에서 당중앙과 팔로군총부의 22개 문건을 학습내용으로 날마다 강의를 들었다. 학습방법은 먼저 집체로 학습하고 다음 소조로 나누어 토론을 벌렸다. 토론 가운데서 각자는 사업 가운데서 부딪치는 실제문제들을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리며 사업신심을 높였다.

이에 따라 무정은 학습과 훈련을 거친 동지들을 패를 나누어 기로예(冀鲁豫), 진찰기(晋察冀), 태항(太行) 등 3개 지역에 파견하여 당지 조선독립동맹 분맹사업을 검사하며 협조하게 하였다. 이 가운데서 각 분맹의 사업은 적점령구로 발전하였다. 적점령구에서의 이들의 주요과업은 조선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형편과 적들이 조선사람들에 대한 각종 정책조치와 조선사람들을 우롱하는 음모궤계 등을 조사하면서 조선사람들이 적들에 대한 태도와 반항실태를 료해하는 것이였다.

무정의 사업경과보고를 보면 1944년 10월부터 12월 사이 기로예분맹은 제남과 롱해로 장권현(陇海路长权县)에 각기 하나의 거점을 앉혔다. 이해 8월부터 태항분맹은 북평에 소조를 건립하고 9월에는 북평소조를 북평분맹으로 발전시키였다. 북평분맹은 점차 4개 소조로 늘어나면서 제1소조 맹원은 55명을 이루었다. 제2소조는 대학교와 중학교의 학생들로 30명, 제3소조는 적들의 어용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12명, 제4소조는 직업이 없는 사람 7명으로 구성되였다. 이 같은 북평 4개 소조의 주위에는 300여명의 진보적 군중들이 뭉치였는데 그들 거개가 청년학생들이였다. 나머지는 문화인들로 알려진다.

1944년 10월 1일, 팔로군 산동군구에서 일본로농학교와 조선혁명군정학교 산동분교 건교식을 가지였다. 대회에는 중국, 일본, 조선 세 나라의 혁명가 200여명이 참가하였다. 연안 《해방일보》(1944년 11월 2일자)의 뉴스에 따르면 회장 정면벽의 복판에는 중국인민의 수령 모택동과 일본인민의 수령 오까노 스스무, 조선혁명의 선배 무정의 초상이 정중히 모셔졌다. 회장 네면의 벽에는 각계에서 보내온 축기와 축하편액들이 걸리였다. 중공중앙 산동분국에서 보낸 축기에는 “매 학생동지들이 혁명리론수양을 강화하여 혁명의 신생력량으로 양성되기를 바란다.”고 씌여졌다.

대회는 <최후의 결전>의 우렁찬 합창 속에서 두 동맹의 20여명 신맹원들이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가맹선서를 한 후 일본로농학교 산동분교 교장 기바시(木桥)와 조선혁명군정학교 산동분교 교장 리명(李明)이 선후하여 연설하였다. 그들은 연설에서 중공중앙 산동분국과 팔로군에 뜨거운 감사를 드리고 나서 전체 학생들에게 친밀히 단결하면서 모범적인 학생으로 싸워가라고 면려하였다.

이어 소화가 중공중앙 산동분국과 팔로군을 대표하여 축하연설을 하고 류부의장(刘副议长)과 전처장(田处长)이 각기 성참의회와 성정위회(政委会)를 대표하여 연설하였다. 그들은 연설에서 두 학교가 새 중국, 새 일본, 새 조선의 창건을 위해 분투하도록, 모든 가능성을 다하여 발전하도록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두 학교의 학생들이 답사를 드리였다. 저녁에는 공동식사와 다채로운 야회를 가지였다.

연안 《해방일보》 뉴스(1945년 2월 19일자)를 보면 일본로농학교 산동분교와 조선혁명군정학교 산동분교는 1945년 2월 4일 오전에 제1기 졸업식 및 제2기 개학식을 가지였다. 두 학교 교장 기바시와 리명이 두 학교 학생들이 4개월 동안 진보한 정황에 대해 개략적으로 보고하였다. 이어 산동군구 라사령원이 축하연설을 하고 여러 부문들에서 축사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두 학교의 졸업생 대표들이 발언하면서 앞으로 꼭 꾸준히 사업하고 배우며 리론을 실천 가운데서 응용하겠다고 다지였다. 대회는 일본말과 조선말로 함께 부르는 <최후의 결전> 노래 속에서 페막되였다. 저녁에는 먼저 개학시 때와 같이 공동식사를 하고 즐거운 야회를 가지였다.

1945년 1월에 천진소조는 분맹으로 발전하였다. 이 분맹의 7명 맹원중 주임을 맡은 이는 상해에서 당원생활을 한 적이 있는 동지였다. 다른 동지들은 조선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한 진보인들로서 그들 모두가 위장적인 상업경영으로 활동하였다. 태악(太岳)분맹은 1945년 3월에 동포로(同蒲路)의 곽현(霍县)에 순수 로동자 5명으로 거점을 설립하고 활동에 나섰다. 적군내에 두 사람의 조선인으로 작은 거점 하나 세우고 산서 림분에도 조선인 두 사람으로 작은 거점 하나 세웠다.

진찰기분맹 주임은 채국번(蔡国藩)이 맡았다. 그런데 채국번은 팔로군 진찰기군구 정치부와 적공부와 모순이 생기면서 적공부의 지도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분맹의 결의도 잘 집행하지 않았다. 진찰기군구에서는 무정 사령원과 토의한 후 채국번을 연안으로 보내였다. 그 뒤 무정은 진찰기군구와 토의하고 진찰기분맹을 기동(冀东)으로 움직이고 조선독립동맹 조직부장 리유민을 기동분맹 책임자로 파견하였다.

그 세월 산해관으로부터 천진에 이르는 넓은 땅에는 일본인들이 꾸리는 농장과 조선인 지주들이 꾸리는 농장 10개가 경영되고 있었다. 이런 농장들에는 조선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리유민은 기동분맹의 동지들과 더불어 이런 농장 조선사람들 속에 뿌리를 박기 시작하였다. 무정은 사업경과보고에서 이 지역 10개 농장중 분맹과 관계되는 농장들을 하나하나 밝히였다. 그중 백각장농장과 로대농장만을 보기로 한다.

하북 란현(滦县)에 자리잡은 백각장(柏各庄)농장은 1944년 5월에 일본의 ‘화북간업회사’(华北垦业会社)에 의해 조직되였는데 319만평방메터의 농경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농장 600여호 주민호중 300여호의 2500여명이 조선농민들이였다. 그들은 1944년 5월 이후 천진과 북평의 일제령사관에 의해 천진, 북평, 로대(芦台) 등지에서 강박적으로 모집되여온 무직업 조선사람들과 그들 가족들로서 11개 마을에 분산되여 생활하였다.

한청의 <<한청항일혁명회상록>>에 따르면 1943년 9월에 한청은 조선독립동맹의 동지들인 진국화(陈国华), 최동광(崔东光)과 함께 한개 공작조를 뭇고 기열료군구에 가 일하게 되였다. 한청이 공작조 조장 겸 기열료군구 조선독립동맹지부 서기를 맡았다. 기열료군구로 가는 도중 진국화와 최동광이 병에 걸려 치료를 받게 되여 한청 혼자서 기열료군구로 가 리운창(李运昌) 사령원의 지도를 받으며 관련 사업에 나섰다. 병을 치료한 진국화도 기열료군구에 와 합세하였다.

진찰기군구에서 일하던 리익성, 리대성, 주연도 무정의 파견으로 동북공작에 나서다가 1944년 5월에 기동군구 당산일대에서 나타났다. 그들 공작조는 란현의 백각장농장과 로태농장을 대상으로 활동하였다. 리익성 등은 백각장농장에서 비밀리에 무장선전공작을 하면서 조선사람들을 항일에로 끌어들이였다. 그들의 영향과 선전으로 백각장 안팎에서 조선의용군을 찾아와서 입대하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졌다. 산해관과 당산 중간지대의 일본군 군영에서 탈주하여 공작조에 가담한 학도병 조씨 등 세 사람이 그러하고 진황도 부근에서 탈주한 김씨, 북평 일본고등보통학교 조선학생 7명이 그러하다. 반백에 달하는 조선 금강산의 승려 기홍기(奇洪基)도 찾아와서 조선의용군에 가입하였다.

1945년 4월초의 어느 날, 백각장농장의 일본경찰서 조선인경찰 김병섭(金炳燮,제주도 사람)과 정동현(郑东贤,경상도 안동 사람)은 자정에 무기를 가지고 군견 한마리를 끌고 유격구로 넘어왔다. 공작조의 전신규(田新奎)가 그들 둘을 조선의용군에 입대시키였다. 8.15광복 후 김병섭은 리홍광지대 중대장으로 정동현은 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또 1945년 6월의 어느 날 자정에 백각장농장 괴뢰경비대 분대장 강상묵(姜相默)은 경비대원들이 무기를 숙영실벽에 걸어놓고 잠자는 틈을 타서 대원 4명을 깨우고는 사람당 무기 몇자루씩 가지고 농장을 벗어났다. 공작조의 정신규가 그들을 맞이하니 무기는 10여자루가 잘되였다고 한다.

1944년 9월 13일에 하북 창려현(昌黎县) 철길 남쪽의 유격구 한 농가에서 조선독립동맹 기열료분맹 및 조선의용군 제1지대(선발대) 설립대회가 열리였다. 설립대회는 리익성이 사회하고 리익성이 조선독립동맹 기열료분맹 주석 겸 조선의용군 제1지대 지대장으로 선거되고 주연이 정치처 주임으로, 리대성이 조직위원으로, 진국화가 선전위원으로 선거되였다. 설립대회 후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북녕철도일대를 중심으로 무장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백각장농장 11개 마을중 6개 마을이 조선독립동맹 분맹과 조선의용군 제1지대의 뜻에 따라 움직이였다.

로대농장:

무정은 사업경과보고에서 로대농장(芦台)은 천진의 동북방에 위치한 농장으로서 일본 ‘조선총독부’에 의해 1940년에 세워졌다면서 로대모범농촌 협동조합(协同组合)과 같이 관리한다고 말하였다. 무정의 사업경과보고에 따르면 여기 협동조합은 ‘기찬회’(冀赞会) 성격을 가진 민퇀의 명의로 행정을 관리하고 있었다. 농장의 경작지는 3500정보이고 농호는 850여호, 인구 4500여명으로 헤아려졌다. 그들 모두가 1940년에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도에서 모집되여온 이민과 동북, 화북 각지에서 강박적으로 모여온 조선사람들이였다. 조선의용군 제1지대가 설립된 후 리대성 등은 로대농장에 들어가서 지하활동을 벌리였다.

이해 1944년 9월 중순에 조선의용군 조직부장이고 조선독립동맹 기동분맹 책임자인 리유민이 조선의용군 제1지대에 온 후 무정의 지시에 따라 소수의 신입대원만 남기고 그 밖의 신입대원 모두를 곧 설립될 연안 조선혁명간부군정학교로 보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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