延边网회원가입비밀번호찾기
연변일보 - 조선족을 알리는 창
 
주말엔   
겨레의 창 사랑한마당 기획련재 인물 • 인터뷰 약동하는 연변
 현재위치: 연변일보 >> 기획 >> 기획련재 >>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 민족의 전설, 항일 장령 무정 장군의 인생비화
민족의 전설, 항일 장령 무정 장군의 인생비화
날짜  2017-10-30 8:02:09   조회  47

 

섭현 하남점진 남장촌 조선의용군 옛 숙박지. (2009년 8월 20일 현지촬영)

첫패로 리익성 지대장이 직접 전신무장한 100명을 이끌고 연안으로 들어갔다. 1944년 10월에는 주연(朱然)이 40명을 보내고 1944년 10월 하순에는 고봉기(高逢基)가 20명을 보내였다.

1945년초 이후 기열료군구의 조선의용군 지하공작은 무정의 지시와 리유민의 지도로 보다 활기를 띠였다. 그들의 지하공작은 백각장농장, 로대농장을 넘어 산해관에서 천진으로 가는 철도연선의 조하농장(潮河农场), 창려농장(昌黎农场), 칠리해농장(七里海农场), 서하남농장(西河南农场) 등에로 뻗어가고 멀리 동북의 금주에까지 뻗어갔다.

무정과 그의 동지들의 활동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1944년 8월 29일 (조선국치 기념일), 진찰기근거지에서 조선학생들이 일본 파쑈전쟁을 반대하는 대표대회를 소집하였다. 대표대회에는 각 학교에서 온 20여명의 대표가 참가하여 열을 올리였다. 무정의 사업경과 보고에 따르면 만주와 일본 중학교 대표 2명, 국내 보성(普成)전문학교 대표 2명, 국내 오산(五山)중학교 대표 2명, 일본 도꾜 명치(明治)대학교 대표 1명, 도꾜 중앙대학교 대표 5명, 일본 불교대학교 대표 1명, 조선 경성(镜城)중학교 대표 1명이였다.

이들 대표들은 모두가 조선독립동맹 맹원으로 가입한 청년들이였다. 이밖에 청도 일본중학교 대표 3명, 북평(北平)상업학교 대표 4명, 제남(济南)중학교 대표 2명은 조선독립동맹의 선전으로 대회에 참가하였다. 대회가 끝난 후 5명 대표가 화북 각지의 학교들에 파견되여 대회의 경과와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팔로군, 변구정부를 널리 선전하는 일에 나섰다. 그외 대표들은 모두 돌아가기를 원치 않아 태항산의 조선군정학교에서 학습하게 되였다.

조선의용군 화중지대

1944년 1월 11일, 조선독립동맹 총부와 조선의용군 총부의 비준으로 화중분맹 제1차 맹원대회와 조선의용군 화중지대 설립대회가 회북의 신사군 제4사 주둔지에서 열리였다. 일본 반전동맹 대표와 신사군 책임자, 정부의 지도자 등 래빈 수십명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조선의용군 리성호(李成镐)가 선참 연설하였다. 그는 연설에서 지난 32년간의 민족독립운동의 경과를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조선인민은 수십차례에 걸친 폭동의 실패로부터 정확한 길을 더듬어냈다. 우리는 중국공산당의 로선, 모택동의 로선이 바로 우리 조선인민의 로선이라는것을 너무나 똑똑히 알고 있다.”

그는 연설에서 화중에서의 우리 조선동포들은 상해, 서주(徐州), 방부(蚌埠)를 중심으로 분포되였는데 상해에 약 10만명, 진포선(晋浦线)연선에 약 5만명, 서주에 약 1300명이 살고있다고 언급하면서 모두가 한사람같이 일떠나 일본제국주의와 싸울 것을 호소하였다.

일본 반전동맹 대표 고또 이사무(高藤勇)와 신사군 제4사 사장 팽설풍(冯雪峰)이 선후하여 연설하였다. 이들의 연설에 이어 규약과 투쟁강령을 채택하고 리성호를 대장으로 하고 김윤덕(金润德)을 조직위원으로, 손달(孙达)을 선전교육위원으로 하는 책임부서를 내왔다. 조선의용군 화중지대 첫 지대장과 조선독립동맹 화중분맹 주임은 리성호였다.

설립 때만 해도 화중지대는 대원이 1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전체 대원들의 명의로 회북에 주둔하고있는 신사군 전체 동지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채택하였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있다.

당신들의 따뜻한 국제주의적 원조하에 오늘 우리는 우리의 무장대오를 조직하게 되였습니다. 나라를 찾으려는 우리의 애국심과 적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은 우리가 총을 들고 일떠나 당신들과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총칼을 들고 항일민주근거지를 보위하며 강도 일제를 무찔러버립시다. 항일민주근거지는 당신들의 국토일 뿐만 아니라 또한 조선혁명인민의 두번째 고향이며 강도 일제는 당신들의 원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최대의 원쑤입니다…

이는 신사군에 보내는 편지의 한 단락이다. 신생한 조선의용군 화중지대는 대원이 10여명이라지만 조선동지들이 화중지역과 신사군부대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38년으로 거스른다. 1938년과 1939년 사이 신사군에서 활동한 조선동지들도 적지 않았다. 1939년에 조선의용대 대원 장문해(张文海,렬사)가 신사군에 파견되여 6개월의 단기훈련을 받고 조선의용대 독립분대에 배치되였다. 1938년 가을과 1939년 여름 사이 연안의 항일군정대학과 중앙당학교에서 공부했던 40여명 조선족학생들이 졸업 후 신사군부대에 파견되였다.

조선의용대 제2지대는 1938년 10월 무한에서 철거하여 국민당 제5전구와 제1전구에 진출한 뒤 우리 신사군부대와의 배합 밑에 일본군진지에서의 대적군선전공작, 삐라인쇄살포, 포로에 대한 공작, 적의 문건 번역 등을 드세게 한 한편 방송과 신문, 군중집회, 극단 등 다양한 형식으로 반일선동을 성세호대하게 벌리였다. 그때 조선의용대 제2지대는 중공지하당지부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며 신사군부대와 두터운 친선을 맺었다. 신사군 제4사 부참모장과 항일군정대학 회북분교 참모장은 팔로군총부에서 파견한 조선인 김웅(金雄)이였다.

조선의용군 화중지대는 이런 토대에서 설립되였기에 화중지역이 그닥 생소하지 않았다. 화중지대는 설립된 후 팽설풍이 지휘하는 신사군 제4사의 구역에 있다가 후에는 황극성(黄克诚) 사장이 이끄는 제3사 구역에 넘어갔다. 조선독립동맹 화중분맹과 조선의용군 화중지대는 신사군 제3사 구역인 강소성 회음지역에 주둔했다. 그때 적통치구와 일본군에 있는 조선사람들 가운데서 광명을 찾아 팔로군, 신사군에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하기에 조선의용군 화중지대는 그 성원 거개가 상해, 남경, 서주(徐州), 사양(泗阳), 숙현(宿县) 등지의 일본군에서 목숨 내걸고 탈출한 조선인 병사거나 조선인 학도병이였다. 그들 가운데는 적의 마수에 걸린 신사군 적후공작원을 구출하고 신사군에 입대한 대원도 있고 일본장교놈을 단칼에 요정내고 조선의용군(1942년 이후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됨)에 의거한 대원도 있었다.

조선의용군 화중분맹 맹원 신상초(申相楚)의 회고자료에 따르면 일본군 소속 조선인 탈주병이 늘어난데서 1944년 8월 15일에 이르러 신사군 제4사에 가입한 조선인병사가 15명가량 되였다고 한다. 제4사에서는 이들 모두를 신사군 항일군정대학에 보내였다. 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군 탈주병들인 조선인들은 정치경제학과 중국어를 배우게 되였는데 정치경제학 교원이 손달이였다. 이들은 신사군 항일군정대학에서 3개월을 배우고 11월에 졸업하였으며 각자의 일터에 나섰다. 신사군 제2사에서도 1945년 정초부터 소속 조선인 청년들을 관련 학습에 내세웠는데 수강자는 50명이 넘어섰다.

신상초 회고에 나오는 자료들이다. 한국 서울시립대학교 문학박사이고 국사학과 교수이며 조선의용군 연구전문가인 염인호 선생의 연구저서 《조선의용군의 독립운동》을 펼치면 신상초는 1977년에 한국의 태양문화사를 통해 ‘탈출’이라는 회고문을 낸 적이 있다고 한다. 이 회고문에서 신상초는 자기는 신사군 제4사에서 학습을 마치고 신사군 제2사로 넘어갔다고 한다. 상해, 남경 등지로부터 탈출해오는 조선청년들을 교육시키라는 과업을 지니고 강소땅 홍택호(洪泽湖)를 건너 남항(南航)하여 찾은 곳이 신사군 제2사 근거지이다. 신사군 제2사에서 신상초는 조선청년들에게 한국사, 맑스-레닌주의 기초리론, 국제정세, 중국공산주의운동 현황 등을 가르쳤다고 밝히여 오늘에 전하여진다.

1945년초에 조선의용군 화중지대 지도부에서는 신사군 군부와 조선의용군 총부의 지시로 신사군 각 사에 소속되였던 조선동지들을 항일군정대학에 집중시켜 정치, 군사 훈련을 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조선독립동맹 화중분맹 주임과 조선의용군 화중지대 지대장은 왕신호(王信虎,즉 金雄)였다. 그는 또 신사군 제3사 참모장 겸 항일군정대학 제5분교 교무주임이였다. 이 분교는 신사군 제3사의 활동구역인 소북항일근거지의 익림진부근(익림진-益林镇-은 오늘의 강소성 부녕현-阜宁县-익림진을 가리킨다.)에 자리잡고 있었다. 무정은 팔로군 활동지역인 산서-하북땅 태항산항일근거지를 떠나 신사군 활동지역인 강소땅 소북항일근거지로 직접 가지는 못하였지만 총부의 지도를 받는 조선의용군 화중지대와 화중분맹의 활동에 깊은 중시와 관심을 돌리였다.

1945년 봄에 신사군의 제1사, 제2사, 제3사, 제4사, 제6사에 소속되였던 조선동지들이 선후하여 항일군정대학 제5분교에 들어섰다. 이 분교는 학생이 수백명이 되나 교실과 숙사가 따로 없었다. 정길운(郑吉云)과 김현대(金贤大)가 소속된 분교 제11대는 학교지도부와 약 0.5킬로메터 떨어진 농가에 들었는데 11대 대부와 취사실도 모두 농가집을 리용하였다.

90여명 학생들은 A반(로농반)과 B반(지식인반)으로 나뉘여지고 반 밑에 8개 소조가 활약하였다. 학생들은 5개월간의 학습기일내에 두개 단계에 걸쳐 정치리론 학습(약 3개월)과 정풍학습(약 2개월)을 위주로 하여야 했다. 이 밖에 문화과도 설치되였는데 A반에서는 ‘조선어’를 배우고 B반에서는 ‘중국어’를 배웠다.

QR코드를 스캔하여 위챗 모멘트에 공유하여주십시오.
저작권성명: 본 사이트 기사를 전재하실 경우에는 연변일보 사명과
기사 작성자명(기자명)을 반드시 표기하여주십시오.
댓글쓰기 글자수 제한 (200/자)
 많이 본 뉴스
  작은 시작으로 큰 꿈 이뤄낸 “따농남”
  “우리 민족문화 한마당”행사 북경서
  작지만 강한 기업, 우리 손으로 만든다
  조선족들 진정한 “우리 집”으로
  “라이트 세븐”, 조선족청년의 도전
  새 시대 청년, 전통떡에 새옷 입히다
  진지한 작품의식, 음악계 “수놓이군”
  무용대 설립해 민족문화 전파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외롭지 않아
  “장애인을 가족처럼 살뜰히...”
 약동하는 연변
  •  화룡 농촌학교건설에 대규모 투자
  •  돈화 년초 계획한 10가지 민생공사 전부 수
  •  “훌륭한 시설 덕에 촌에서 병 보입니다”
  •  련합테스트 고속렬차 훈춘에 들어서
  •  연길 조양오수처리공장 사용에 투입
  •  도시농촌건설사업 개혁템포를 전면 다그치
  •  연길모드모아휴가촌 캠핑카캠프장 건설
  •  “시골마을 정취에 취해보세유...”
 
연변일보  |  리용약관  |  제휴제안  |  기사제보  |  광고신청  |  구독주문  |  오시는 길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Tel: +86-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吉ICP备09000490号 | 吉新出网备字005号 | Copyright © 2007-2017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