延边网회원가입비밀번호찾기
연변일보 - 조선족을 알리는 창
 
주말엔   
겨레의 창 사랑한마당 기획련재 인물 • 인터뷰 약동하는 연변
 현재위치: 연변일보 >> 기획 >> 기획련재 >>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 민족의 전설, 항일 장령 무정 장군의 인생비화
민족의 전설, 항일 장령 무정 장군의 인생비화
날짜  2017-11-13 8:53:27   조회  14

 

1945년 5월에 전선과 적구에 나가 사업했던 동무들이 륙속 분교에 모여든 데서 군정학교 개학식을 할 조건이 구비되였다. 조선독립동맹 화중분맹 지도부에서는 여러가지 원인으로 입대식을 하지 못한 대원들이 비교적 많은 데 비추어 군정대학 개학식과 신입대원 입대식을 같이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되자 선전부와 문예부, 체육부에서는 각자의 준비사업을 면밀히 짜고들었다. 어떤 대원들은 대회장에 무궁화를 차려놓겠다면서 련 며칠간 휴식시간을 타서 학교부근의 산과 들을 참빗질했다.

 

대회는 수수한 농가집에서 진행되였다. 주석대 책상 우에 놓여진 무궁화 한묶음이 유난히 아릿다웠다. 항일군정대학의 부교장과 신사군 3사 정치부의 대표 및 일본인민해방동맹 소북지맹 대표가 대회에 참석하여 이채를 더해주었다. 이날 왕신호를 지대장으로 하고 리덕무(李德武)를 부지대장으로, 손달을 정치지도원으로 하는 조선의용군 화중지대 새 지도부가 조직되였다. 이날 축구시합과 경축야회까지 벌어져 분위기는 제법 흥성흥성하였다.

 

첫 단계 리론학습이 마무리질 무렵 조선독립동맹 대표대회 소집 소식과 조선의용군 화중지대 대원들을 연안의 조선혁명군정학교로 보내라는 당중앙과 조선의용군 총부의 지시가 화중지대에 전해졌다. 지대부에서는 전체 대원들을 두개 편대로 나눈 뒤 한개 편대(소수로 구성)가 화중에 남아 학습을 견지키로 하고 다른 한개 편대는 연안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945년 6월 20일, 화중지대의 첫패 대오가 지대장 왕신호의 인솔하에 북상길에 오르고 나머지 대원들은 본교에 남아 두번째 단계인 군정학습에 참가하였다.

 

희망의 래일 안고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과 그의 동지들의 파타는 노력하에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여러 항일근거지의 조선독립동맹 분맹들로는 산동군구, 신사군, 기로예군구, 태항군구, 태악군구, 진찰기군구, 기동군구, 진서북군구, 연안, 태항군정학교 도합 10개 분맹으로 늘어났다. 그중 태항산의 2개 분맹은 직접 조선독립동맹총부의 지도를 받았다. 적점령구의 분맹들로는 천진, 북평, 할빈, 서울 등 4개 분맹으로서 팔로군총부의 협조하에 조선독립동맹이 직접 지도를 강화하였다.

 

이 밖에 개봉(开封), 서주(徐州), 제남, 민권(民权), 승덕, 림분, 유차(榆次), 곽현(霍县), 태원, 석가장, 순덕(顺德), 신향(新乡) 등지 적점령구들에 활동거점이 뿌리를 박았다. 무정은 1945년 5월 9일 팔로군 주덕 총사령과 당중앙에 올린 1944년 1월부터 1945년 5월까지 화북독립동맹 사업경가 보고에서 이런 매 활동거점들에 3~4명의 지하공작자 배치되였다고 하였다. 화북대지의 여러 농장들에도 약간의 활동거점들이 조직되였다고 무정은 덧붙이고 있다. 한데서 적점령구 활동거점들을 제외한 팔로군 여러 군구와 항일근거지들에서는 조선독립동맹 분맹과 조선의용군 동지들이 부르는 <아리랑>과 아리랑을 비롯한 조선민요와 혁명노래들을 자주 들을 수가 있었다.

 

어마어마한 분맹들과 활동거점들, 곳곳에 울려퍼지는 아리랑 노래. 이로부터 보면 무정과 무정이 이끄는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의 활동과 조직선은 화북과 화중, 기동지구, 동만과 남만, 북만을 포괄하는 동북지구, 조선(한국) 국내에로 널리널리 뻗어갔다. 이는 조선반도(한반도)와 중국 동북,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는 조선혁명가, 항일운동가들치고 전례가 없는 일이다. 무정은 국내와 중국내 전체 조선민족을 대상하는 활동의 중심에 서고 있었다.

 

그 활동중심지는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연안과 태항산항일근거지였다. 이 활동중심지를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구심점으로, 튼튼한 믿음의 후방으로 건설하고저 무정은 드넓은 흉금으로 일부 동지들과 더불어 태항산에 남아 각지 분맹활동을 힘있게 지도하고 회보를 받는 한편 태항산 조선동지들의 학습과 훈련, 생산활동을 억세게 틀어쥐였다. 그 생동한 실례의 하나가 조선의용군 전사 리섭이 말하는 ‘쪽걸상과 특수과업’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리섭의 회고문-태항산의 자급자족에 그대로 올라있다.

 

1944년 2월 9일자 연안 《해방일보》는 1944년 음력설날 조선의용군은 ‘신편 조선가극 <아리랑>과 <팔로군은 백성의 대오>를 공연’하였다고 밝히여 우리의 주의를 끄당긴다. 물론 《해방일보》뉴스에는 신편 조선가극 <아리랑>의 공연장소가 태항산의 모촌이라고만 적히여있다. 하지만 조선의용군 관련 지식이 조금만 있는 사람이라면 1944년 2월 그 시절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나 태항산의 조선의용군은 섭현의 하남점진 남장촌에 주둔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때 남장촌 희대는 지어져쓰이고 있었고, 조선가극 <아리랑> 등을 공연할 공연장소는 희대 뿐이였다.

 

2월 9일자 《해방일보》는 태항의 조선의용군은 정부를 옹호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활동을 벌리였다면서 지난달인 1월 23일 전체 간부들은 반성대회를 가지고 저마다 자기비판을 하였다고 쓰고 있다. 그날 조선의용군은 팔로군의 ‘3대기능’인 “싸울 줄도 알고 생산로동도 할 줄 알고 군중과 단결할 줄도 아는 재간을 따라배우자”는 구호를 내놓았다고 한다. 《해방일보》뉴스는 밝히지 않았지만 이 구호를 내놓은 사람은 조선의용군 무정 사령원이였다. 《해방일보》는 계속하여 “회의가 열린 후 전체 간부들은 의용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마을에 내려가 군중 규률준수 정황을 검열하면서 백성들의 물건이 파손된 것이 있으면 책임동지가 직접 배상하고 사과하였다.”고 쓰면서 “음력설 날에 그들은 모 촌에서 항일군인가족과 제대군인들을 청하여 좌담회를 열었고 또 그들과의 공동식사를 마련하였다. 저녁에는 또 군민련환야회를 조직하였다.”고 보도하였다.

 

《해방일보》 기사는 밝히지 않았지만 여기 음력설 날은 1944년 1월 25일을 가리키고, 모 촌은 남장촌을 가리킨다. 음력설 날 1월 25일, 조선의용군은 관련 좌담회에 이어 그들과의 공동식사, 저녁 군민련환야회를 련속 가지였다. 의미로운 것은 ‘야회에서는 신편 조선가극 <아리랑>과 <팔로군은 백성의 대오>가 공연’되고 ‘당지 군중들도 많은 음식으로 조선의용군을 위로하였다.’는 대목이라 하겠다. 1939년 3월 계림과 1940년 5월 서안에 이어 다시 보여지는 가극 <아리랑>의 공연이다. 조선의용대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조선의용군 모두가 가극 <아리랑>을 중국땅 항일무대에서 공연하였으니 아리랑 항일운동사의 일대 장거가 아닐 수 없다.

 

유감도 없지 않다. 1944년 2월 9일자 《해방일보》는 신편 조선가극 <아리랑>이 공연되였다는 한마디외 더 보여주는 무엇이 없다. 보여지는 직접적인 자료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허나 조선의용군과 무정 장군에 대한 꾸준한 연구와 태항산 현지답사에 의하면 신편 조선가극 <아리랑>이 태항 남장촌 희대에서의 공연은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 장군의 지시에 따른 조선의용군 극단의 공연임을 헤아릴 수가 있다.

 

조선의용군 극단 책임자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선전 부장인 김창만으로서 1939년 3월 광서 계림에서의 가극 <아리랑> 극본도, 공연연출도 모두 김창만의 작품이였다. 그로부터 5년 후 김창만은 계림의 가극 <아리랑>을 변화된 항일정세에 어울리게 다시 수정하여 신편 조선가극으로 태항산근거지의 무대에 올리게 되였다.

 

더 밝힌다면 신편 조선가극 <아리랑> 각색과 연출은 김창만이고, 아리랑 녀주역은 김창만의 안해 김위 녀사라는 점이다. 하지만 1939년 3월 가극 <아리랑>과 더불어 1944년 음력설 날 밤의 신편 가극 <아리랑> 극본도 찾아내지 못하여 유감이고 안타깝기만 하다. 2009년 8월 20일 남장촌 현지답사시에는 신편 가극 <아리랑> 공연에 중시를 돌리지 못한 데서 보다 유감만 남기였다.

 

1943년 년말을 계기로 첫패의 조선의용군 장병들이 연안으로 떠났지만 태항산근거지 남장촌에는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가 의연히 남아있었다. 연안 《해방일보》 1944년 2월 13일자 뉴스에 따르면 무정 등은 원래의 학교이름을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로 개칭함을 보인다. 학원들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팔로군근거지와 적점령구의 여러 분맹들에서 한패 또 한패의 조선인 열혈청년들을 륙속 태항산 무정에게로 보낸 데서  1945년에 이르러 신입학원들이 많이 늘어났다.

 

무정의 사업경과 보고(1945.5.9)에 따르면  태항산의 새로운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즉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는1945년 3월 1일에 섭현 하남점 서남쪽 남장촌 절간에서 정식 개학식을 가지였다. 학제는 1년이고 매일 수업시간은 6시간, 토론시간이 2~3시간이였다.

 

학급은 학원들의 문화수준에 따라 고급반과 중급반, 저급반 3개 학급으로 나누었다.

 

고급반은 중학문화나 대학문화 정도을 가진 청년들로 구성되였다. 이들 과목 비례는 군사과 60%, 정치과 40%인데 정치과는 시사와 사회발전사, 신민주주의론, 조선혁명운동사, 정치경제학, 철학, 군대중의 정치사업 등 과목으로서 한 과목이 끝나면 다른 과목이 이어졌다.

 

중급반은 소학문화 정도로 구성되였다. 이들은 일정한 접수능력을 가졌다지만 고수준의 리론문제는 잘 리해하지 못하였다. 하기에 중급반의 정치과는 정치경제학, 철학 등 면의 일반 상식으로서 계발식과 문답식 교수방법을 강구하였다.

 

저급반은 문화수준이 소학교정도에도 미치지 못한 학원들로서 거개가 중문을 모르고 있었다. 저급반 교육은 정치, 군사과외에 문화과를 설치하고 정치과가 40%, 군사과가 10%, 문화과가 50%를 이루었다. 정치과는 일반적인 초급 정치상식들로 엮어졌다.

 

무정이 지도하는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의 편제를 보면 학교 교장은 무정이고 정치교원은 무정과 조선의용군총부 선전부 선전과장 양계(杨界), 선전부 자료과장 박무(朴茂) 셋이 담당하였다. 교무주임은 장치민(张治民)이고 산하에 교무간사, 특무장(特务长), 상사(上司), 취사반장, 취사원, 전보원 등 10여명을 두었다.

 

전교 학원 293명을 2개 학생련으로 나누었다. 학생련은 각기 3개 패,  9개 반(한개 반은 11~12명)으로 구성되였다. 293명 학원중 대학생출신이 20명, 중학교출신이 82명, 소학교출신이 76명, 농민출신이 20명, 로동자출신이 2명이고 나머지는 도시의 빈민, 소상인 등 출신들이였다. 무기를 보면 보총 93자루, 경기관총 3자루, 적탄통 6개, 수류탄 63개, 몇개의 지뢰가 있었다. 이런 무기들중 팔로군부대에서 일부를 제공한외 대부분은 조선동지들 자체로 마련한 것이였다.

 

여기 나오는 태항산 조선혁명군사학교의 모든 자료는 무정이 1945년 5월 9일에 1944년 1월부터 1945년 5월까지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사업경과보고를 당중앙에 올린 자료에 반영되고있다. 조선혁명군사학교 관련 무정의 사업경과보고를 보면 혁명가로서의 무정의 드넓은 흉금과 진지한 사업태도, 사업범위가 그대로 잘 알려져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흥이 나는 것은 이들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 고급반과 중급반, 저급반의 매일 일과의 하나가 아리랑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조선민요와 혁명가요를 부르는 것이였다. 대회를 가지거나 만회, 오락회를 가질 때면 선참 어김없이 불리여지는 노래가 우리 민요 <아리랑>노래였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르는 노래도 아리랑이였다.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는 말이 학교이지 낡은 절간을 수리하여 숙사 겸 교실로 쓸 뿐이였다. 교탁이나 책상, 걸상도 없어서 학원들은 얇은 이불을 묶어서 걸상처럼 깔고 앉으며 무릎을 걸상으로 하였다. 그러면 얇은 이불로 습기가 올라와서 내복도 없이 솜옷만 입고 있는 학원들의 엉뎅이가 축축해났다. 밤에는 또 그 눅눅한 이불을 덮고 자니 학원들 속에서는 치질병과 피부병, 관절염이 생겨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를 안타까이 생각한 무정은 리섭에게 제법 걸상은 아니여도 쪽걸상이라도 만들어주자며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하였다.

방직공장을 꾸릴 때처럼 재목이 또 문제로 나섰다. 그렇다고 다시 당지 로인들의 관널을 바랄 수는 없었다.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지난 여름 홍수때 김평이와 같이 청장하로 떠내려가는 나무들을 건져내던 일에 생각이 미치였다. 그때 기진맥진하면서도 여러 통나무를 바줄에 매여 끌어올린 일이 있었다.

 

신바람난 리섭이 취사실 앞마당으로 달려가 땔나무더미를 헤치니 통나무들이 나지였다. 리섭은 무정 사령원에게 회보하면서 사람을 요구하였다. 무정 사령원도 흥이 났다. 목수며 사람들이 배치되니 제법 쪽걸상이 만들어졌다. 리섭이 시제품을 갖고 가서 무정 사령원에게 보이니 무정은  인젠 우리 학생들이 더는 눅눅한 땅바닥에 앉지 않게 되였다며 눈물 나도록 기뻐하였다.

 

학교 학원들을 위한 쪽걸상 200여개가 이렇게 만들어졌다. 뜻하지 않은 숱한 쪽걸상들이 생겨났다고 기뻐난 학생들은 얼씨구나 ~ 아리랑을 부르며 춤추며 돌아갔다. 그 흥겨운 모습을 보는 무정은 마음이 흐뭇해났다.

 

얼마 후 무정 사령원이 또 리섭을 불렀다. 1944년 7월 22일 유엔 재중사령관이 파견한  미국 군사고찰단이 연안을 방문하였는데 그들은 조선의용군의 연안 군정학교도 방문하고 태항산의 군정학교도 방문할 목적으로 곧 태항산으로 오니 귀한 손님들을 접대할 안락의자와 둥근 탁자를 만들어야겠다는 청탁이다. 리섭은 난생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우선은 목수일에 달라붙어보았다. 무정 사령원이 짬짬이 시간을 타서 일손을 거들어주는가 하면 총부 김영숙 조직과장도 팔소매를 걷고 나섰다.

 

리섭과 무정, 김영숙의 노력과 합작은 헛되지 않았다. 수수하지만 보기 좋은 안락의자와 둥근 탁자가 하루새에 만들어졌다. 연기에 그은 움집을 말쑥하게 회칠하고 안락의자와 둥근 탁자를 들여다 놓으니 제법 응접실이 차려졌다.

 

때는 1945년 새해벽두의 일이다. 미구하여 연안에서 미국손님들이 오고 대련호텔에서 료리기사로 근무한 적있는 안희현이 식사를 도맡아나섰다. 그가 만든 빵과 료리는 물론 마른 감 속에다 호두 속을 닦아 넣어 만든 간식용 쵸콜레트는 미국손님들의 입맛과 구미를 돋구었다. 미국손님들은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사생들이 교실과 숙박지에서 부르는 구성진 <아리랑> 등 조선민요를 듣고는 엄지손가락을 내들면서 “당신들 조선민족은 정말 대단한 민족”이라고 감탄해마지않았다. 미국고찰단의 손님들이 태항산을 떠나 자국으로 돌아간 사흘 후에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과의 담화 내용이 신문지상에 보도되였다고 한다.

쪽걸상과 특수과업, 조선의용군 전사 리섭의 회고문을 통하여서도 우리는 태항산근거지에서 희망의 래일을 안고 헌신적으로 싸우는 무정 장군의 일각을 들여다볼 수가 있다.

QR코드를 스캔하여 위챗 모멘트에 공유하여주십시오.
저작권성명: 본 사이트 기사를 전재하실 경우에는 연변일보 사명과
기사 작성자명(기자명)을 반드시 표기하여주십시오.
댓글쓰기 글자수 제한 (200/자)
 많이 본 뉴스
  작은 시작으로 큰 꿈 이뤄낸 “따농남”
  “우리 민족문화 한마당”행사 북경서
  작지만 강한 기업, 우리 손으로 만든다
  조선족들 진정한 “우리 집”으로
  “라이트 세븐”, 조선족청년의 도전
  새 시대 청년, 전통떡에 새옷 입히다
  진지한 작품의식, 음악계 “수놓이군”
  무용대 설립해 민족문화 전파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외롭지 않아
  “장애인을 가족처럼 살뜰히...”
 약동하는 연변
  •  화룡 농촌학교건설에 대규모 투자
  •  돈화 년초 계획한 10가지 민생공사 전부 수
  •  “훌륭한 시설 덕에 촌에서 병 보입니다”
  •  련합테스트 고속렬차 훈춘에 들어서
  •  연길 조양오수처리공장 사용에 투입
  •  도시농촌건설사업 개혁템포를 전면 다그치
  •  연길모드모아휴가촌 캠핑카캠프장 건설
  •  “시골마을 정취에 취해보세유...”
 
연변일보  |  리용약관  |  제휴제안  |  기사제보  |  광고신청  |  구독주문  |  오시는 길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Tel: +86-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吉ICP备09000490号 | 吉新出网备字005号 | Copyright © 2007-2017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