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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전설, 항일 장령 무정 장군의 인생비화
날짜  2017-12-4 8:54:14   조회  345

연안의 조선사람 동네

1943년말부터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활동하던 조선 동지들이 중공중앙의 결정에 의해 집단적으로 연안으로 전이하기 시작하였다. 1944년 4월 7일에 이르러 신사군 속의 조선 동지들을 제외한 대부분 동지들이 연안에 집결하였다. 조선 동지들이 연안에 이른 후 조선독립동맹총부는 처음 연안성에서 10여리 떨어진 라가평골짜기에 자리를 잡았다. 라가평(罗家坪)은 제지공장 하나외 민가가 없다보니 사실상 조선사람 동네였다.

조선 동지들이 처음 연안에 가니 먹고 입는 등 일상생활용품은 몽땅 섬감녕변구정부에서 공급하였다. 이를 부끄럽게 여긴 조선 동지들은 자기들도 연안군민들처럼, 태항산에서처럼 대생산운동을 일으켜 풍의족식하자고 다지였다. 정작 생산운동을 벌리고 보니 밭이 없고 자금이 없고 생산도구가 없었다. 이를 알고 있은 팔로군총사령 주덕은 섬감녕변구정부와 연안의 항일군정대학들에 지시하여 조선 동지들이 부딪친 어려움을 해결해주도록 하였다. 잇달아 조선 동지들 자체의 농장, 벽돌기와공장, 엿공장이 일어서고 몇십대의 물레가 갖추어졌다. 남새밭도 가꾸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인차 대생산동원대회를 가지고 자기의 힘으로 자급자족하자고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원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와 태항산에서 연안으로 간 조선의용군 동지들은 무정 사령원의 지시에 따라 대생산동원대회를 가지였다. 대생산동원대회가 끝난 후 조선혁명군정학교 소속 농장생산대의 40여명 동지들은 대장과 지도원의 인솔하에 선참 감천현(甘泉县) 경내의 산에 가서 황무지개간에 떨쳐나섰다. 벽돌기와공장의 15명 동지들은 교아구(桥儿沟)에서 벽돌과 기와굽기 고조를 일으켰다. 남새조, 목공조 그리고 녀성들과 몸이 허약한 동지들로 조직된 방사조는 학교가 자리잡은 천구(天沟)에 남아 대생산운동에 뛰여들었다. 엿공장을 맡아나선 동지들은 동관(东关)으로 갔다. 연안 《해방일보》의 1945년 2월 21일자 뉴스이다.

연안은 중국혁명의 성지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독립동맹의 여러 분맹들에서 조선사람 신입생들을 륙속 조선혁명군정학교로 보내여서 천구(天沟)의 학교규모로는 그들 모두를 배치하기가 어려웠다. 학교를 조선의용군총부가 자리잡은 라가평골짜기로 옮기였으나 숙소문제는 의연히 풀어야할 문제였다. 학교에서는 자체로 학교와 집을 짓기로 결정하고 1944년 9월 중순부터 라가평골짜기 왼쪽 산비탈 후미진 곳에 서로 마주보이는 움집을 파고 숙소를 짓기 시작하였다. 봄부터 반년 남짓한 품을 들이니 쓰고살 움집과 숙소가 있게 되고 먹을 쌀과 남새가 있게 되였다.용돈도 조금씩 있게 되니 웃음이 절로 났다.

연안 조선 동지들의 대생산운동은 혁명적 락관주의로 넘쳐나는 생산현장이였다. 류동호(刘东浩) 소속 제1구대는 감천에 가서 황무지를 일구고 감자와 메밀 등을 심고 가꾸며 어느덧 8월 추석을 맞이하였다. 제1구대 전사 류동호의 회고에 따르면 제1구대 여러 분대들에서는 추석맞이 문예오락종목 준비에 나섰는데 구락부 활동 열성분자인 류동호는 속이 부쩍 안달아났다. 하루밤, 하루낮 사이에 새 종목을 내놓자니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조선 평안도 일대에서 부르는 민요 <호메가>였다. 류동호반의 황신오(黄信伍)가 평소 이 민요를 즐겨 이들 반의 전사들은 호메가노래를 곧잘 불렀다.

류동호는 평안도 룡암포(龙岩浦)일대 호메가 민요에 가사를 붙이기로 했지만 가사가 신통치 않았다. 그의 말을 빈다면 ‘낑낑 갑자르’다가 떠오른 생각이 ‘우리 반에 남은 임무가 뭐냐? 알뜰하게 걷어들이는 거지. 옳아! 우리가 땀흘려 지은 열매를 걷어들이는 거’다. 이렇게 처음 피운 솜씨가 이러하다.

알뜰하게 가꾸어라

땀에서 나오는 열매로다

이 가사를 민요곡에 맞추어보니 그럴 듯하다. 여럿이 좋다고 떠들었다.  전광일(权光日)전사의 건의에 따라 ‘열매’를 그의 고향 습관 대로 ‘곡식’이라고 바꾸었을 뿐이다. 따라서 10명이 두개 조로 나뉘여 노래련습에 달라 붙었다. 한조에서 김매는 동작을 하면서 노래를 부를 때 다른 조에서는 양걸동작에 맞추어 빙빙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호메가 새 가사는 모두 8절이라고 하나 류동호는 자기 회고록에서 아무리 해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어찌하든 한조에서 1절을 부르면 다른 조에서 2절을 부르고 1절을 부른 조가 3절을, 2절을 부른 조가 4절을 부르니 성수가 났다. 마감절은 무정 장군의 말씀ㅡ “우리 대오는 일하며 배우고 배우며 일한다.”에 비추어 합창으로 만들어놓았다.

일하면서도 배울 수 있는

즐거운 일터로다 배움터로다

1944년 8월 추석날 저녁 추석맞이공연은 대성공이였다. 평소 구락부활동보다 더 잘되였다고 한다. 그 후부터 1945년 설을 앞둔 조선의용군 새해경축야회에서 또 <호메가>노래가 무대에 올랐으니 그 후부터 조선의용군내에는 <호메가>노래가 널리 불리여졌다. 황무지개간과 농사짓기는 빠르게 진척되여갔다.

무정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았던 원 태항조선혁명군정학교 동지들의 대생산운동은 기꺼운 열매를 맺었다. 농장개간대의 동지들은 500무의 황무지를 일구고 많은 량곡을 거두어들였으며 숯 1만 1000근을 구워내고 널판 65장을 켜냈다. 움집짓기 건설대는 움집 17개를 파고 집 18칸을 지어 800여원을 절약하였다. 벽돌공장에서는 벽돌 5만장, 기와 4만장을 구워 50만원의 리윤을 올리였다. 남새조에서는 남새 1만근을, 방사조에서는 면사 48근, 거친 털실 40근(내부용)을 생산하고 털내의 166벌을 떠서 10만여원을 절약할 수 있었다.

조선 동지들은 대생산운동을 힘있게 밀고나가는 한편 연안 조선혁명군정학교 건설을 다그쳤다. 1944년 12월 10일에 이르러 강당과 식당, 움집 등 새 교사가 잇달아 완공되였다. 1944년 12월말에 조선의용군총부와 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는 전교 대생산총화모임을 가지고 최동광 등 9명의 로동모범을 표창하였다. 그중 3명은 중국동지들이였다.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이 최후단계에 들어서면서 연안은 보다 떠오르면서 국내외가 주목하는 혁명의 성지로 뜨르르하였다. 조선의용군 전사 최동광(崔东光)의 회고에 따르면 “국민당비행사가 전투기를 몰고 의거해 넘어오는가 하면 동맹국의 참관단과 대표들도 련속부절하게 연안으로 왔다. 심지어 연안에는 미국대표단까지 주재하고 있었다.” 1945년을 잡으면서 당중앙에서는 연안비행장을 건설하기로 결정짓고 연안의 군민 수천명을 연하강반의 비행장건설에 동원시켰다. 조선의용군의 근 100명 동지들은 박일우, 정률성 등 지도일군들의 인솔하에 <조선의용군행진곡>을 씩씩하게 부르며 비행장건설에 나섰다. 그들은 강바닥의 개흙을 파내고 멜대채 휘도록 돌을 메여나르며 기한 전에 맡은 바 임무를 뛰여나게 완수하였다. 조선의용군은 비행장건설지휘부로부터 여러차례나 붉은기를 수여받고 표창받았으며 그 성망이 온 연안땅에 뜨르르했다.

어느덧 연안에서의 한해가 훌쩍 지나갔다. 1945년 2월 5일 오전에 라가평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 개학식이 성대히 열리였다. 팔로군 주덕 총사령이 몸소 개학식에 참석하였다. 섬감녕변구 주석 림백거(林伯渠)와 서특립(徐特立), 오옥장(吴玉章) 등 동지들도 이날의 개학식에 참석하였다. 중앙조직부, 중앙당학교, 연안항일군정대학, 일본인해방련맹, 조선독립동맹 등 기관과 단체들에서 축기와 주련, 족자 등을 보내왔다.

연안 《해방일보》 1945년 2월 10일자 뉴스에 따르면 조선혁명군정학교개학식은 <조선의용군행진곡>의 우렁찬 합창 속에서 시작되였다. 부교장 왕외(王巍, 즉 朴一禹)가 개학식을 사회하고 교장 김두봉(金抖奉,金白渊이라고도 한다)이 개회사를 했다. 김교장은 개회사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의 목적과 과업은 간부를 양성하고 조선민족의 해방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주덕 총사령이 연단에 올랐다. 그는 연설에서 요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조선 동지들은 민족통일전선을 어떻게 결성하는가를 배워 전체 조선인민을 묶어세우고 자기의 무장대오를 조직하여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전취하며 군사를 배우고 정치를 배우고 또 경제와 생산도 배워야 한다. 중국공산당의 풍부한 경험은 조선 동지들에 대해 말하면 참고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섬감녕변구 주석 림백거는 축하연설에서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나가는 조선혁명지사들의 영용한 정신을 찬미하고 나서 목하 반파쑈력량의 강화는 조선의 구국운동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주고 있는바 중국인민은 만강의 열정으로 조선혁명을 지원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연안에 온 일본공산당 수령 오까노 스스무는 통속한 일본어로 축하연설을 하면서 “꼭 해방될 미래의 조선과 일본은 진정으로 평등하고 서로 돕는 형제의 나라로 될 것이다.”고 강조하여 나섰다. 이어 미국래빈, 오옥장, 서특립, 윁남 동지 황중광(黄仲光), 일본인해방련맹대표 야마다(山田), 조선독립동맹 연안분맹 대표 등이 선후하여 열정이 넘치는 축사를 하였다. 개학식 축하모임에서 다시 민요 <아리랑>노래가 울려퍼지며 흥겨운 춤판이 벌어졌다. 지난 세기 90년대 초반, 조선의용군 출신 류동호 로혁명가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조선혁명가들인 김두봉이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장을 맡고 박일우가 부교장을 맡았다. 군정학교 산하에 교육과와 총무과를 두고 정률성과 주덕해를 각기 과장으로 임명하였다. 학생들 200여명은 4개 구대와 15개 분대로 나뉘였다. 그중 제2구대의 제8, 9분대는 녀성분대였다. 군사과목은 군사리론과 기본훈련, 련병조례, 사격과 병기학, 분대전투, 중대전투, 지형학 등이였다. 정치과목은 맑스—레닌주의기초, 조선근대사, 련공당사, 철학, 사회발전사, 련합정부에 대하여 등이였다. 이 밖에 교외의 지명인사들을 청하여 강의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연하강반의 라가평은 종일 흥성흥성했다. 라가평은 어디를 보나 민요 <아리랑>노래를 비롯한 조선의용군행진곡, 최후의 결전 등 노래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일제의 망국노가 된 조선민족의 아픔, 조선민족의 한을 담은 <아리랑>노래는 일제의 침략을 당하고 있는 중국인들과 강렬한 공감대를 이루며 절절히 울려퍼지여 듣는 이들의 심장을 쾅쾅 울리였다. <아리랑>은 그야말로 조선민족의 디아스포라의 상징이였다.

긴장하고도 희망으로 넘친 연안 라가평생활 가운데서 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는 늘 다채로운 문예활동을 가지였다. 문예활동이 있을 때면 모두가 열성적으로 참가하여 장끼를 부리였는데 그 종목으로 보면 노래와 춤, 시랑송, 연극 등이였다. 라가평에서 1945년 새해를 맞으면서 가진 전교적인 오락야회가 그러한가부다. 당년 조선의용군의 꼬마로 불리우는 김응삼(金应三)의 회고에 따르면 그날의 오락야회는 노래, 춤, 시랑송외에도 여러개의 간단한 연극까지 공연되였는데 조선의용군 녀대원 김영옥(金英玉)이 연극 <규률>의 주역을 맡아 나서고, 김응삼이 연극 <처녀유격대>의 주역을 맡아나섰다.

연안 라가평은 그야말로 인심을 끄당기는 조선 동지들의 생활요람이였다. 2012년 7월 3일, 그 나날의 라가평을 찾아 쌍둥이 큰 딸애 설이의 동행으로 현지답사길에 올라보았다. 라가평은 연안성에서 동으로 10여리 떨어진 고장에 자리잡았고, 민가 하나 없는 고장이라 하더니만 오늘의 라가평은 연하와 철길을 사이 두고 북쪽 골짜기는 라가평마을로 차고넘치고 남쪽 평야는 연안시가지가 그대로 이어진 번화한 시동쪽구역이였다.

연하강반 남쪽 대교가에 세워진 ‘라가평촌’이란 세멘트표지비가 선참 우리를 반겨주었다. 연하를 가로지른 라가평대교를 지나 철길가에 자리한 라가평촌 어구에 이르니 1996년 7월 1일에 연안지구문물관리위원회에서 세운 ‘조선혁명군정학교옛터소개’ (朝鲜革命军政学校旧址简介)비가 유난히 이목을 끌었다. 옛터소개비를 지나 걸음마다 길을 물으며 마을을 따라 들어갔다.

7월초의 연안의 날씨는 최고기온이 30도를 웃돌아 무더위가 마구 쏟아졌다. 남북으로 앉은 골짜기 동서를 자세히 살펴보고 골짜기 왼쪽가를 선택한 우리는 무척이나 땀동이를 쏟아야 했다. 그래도 우리 조선의용군이 활동하고 연극까지 놀았다는 연안의 라가평이란 력사의 고장을 찾았다니 힘든 줄을 모르겠다. 우리 부녀간은 골짜기 왼쪽가를 오르고 또 오르며 산밑에 이르러서야 막바지 한 토굴집에서 시원한 대답을 들었다. 자기들 토굴집 웃 구간 전부가 옛날 조선의용군이 자리잡았던 자리들이라고 한다. 그것도 70 고개를 넘어보이는 주인집 할머니의 말이다.

성수가 났다. 우리는 산중턱으로 치달은 경사진 비탈에서 끝내 조선의용군의 옛 토굴집들을 찾아냈다. 비물이 흘러내리며 이루어진 깊숙한 홈채기에는 홈채기 량쪽으로 토굴집이 련이어 7~8개나 나타났는데 오랜 토굴집들은 앞이 허망이고 토굴집 안은 엉성한 그대로였다. 이 밖에도 주변에는 옛 토굴집자리가 허다하였다. 아무런 표시도 없어 무엇이 무엇인지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다. 그래도 우리 조선의용군부대가 자리하고 노래와 춤, 시랑송, 김응삼 항일로간부가 회고하는 <처녀유격대> 연극 등이 펼쳐진 력사의 자리여서 크나큰 위안을 느낄 수 있었다.

라가평골짜기 왼쪽 산비탈 움집가에서 골안어구 아래를 내려다보니 흥성하는 라가평마을 전경이 펼쳐지며 그너머 연안시가지가 한눈에 안겨든다. 그러노라니 마음은 살같이 력사의 언덕을 거스르며 1945년으로 치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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