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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전설, 항일 장령 무정 장군의 인생비화
날짜  2017-12-11 8:47:57   조회  138

7차 대회와 대회 후

1945년 4월 23일 오후 5시에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가 연안 양가령(杨家岭)의 중앙대강당에서 성대히 개막되였다. 이 소식이 연안 조선혁명군정학교와 조선독립동맹, 동북항일련군 야영부대 등지에 전해지자 조선족혁명자들은 련일 들먹이는 심정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7차 당대회의 개막 소식은 라가평을 들썽하였다. 조선동지들은 서로 달아다니며 이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대회의 개막을 열렬히 경축하였다. 그들은 자기들 학교의 부교장 박일우동지가 정식대표로 중대한 력사적 의의가 있는 이 대회에 참가한 것을 더 없는 영광으로 간주하였다. 조선독립동맹에서는 동맹 전체 성원들의 마음을 담아 당 제7차 대표대회에 축하편지를 보냈다. 그 전문은 아래와 같다.

중공 7차 대표대회에 드림: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 신사군과 중국인민은 영용한 항전으로 일본제국주의에 치명적인 타격을 안김으로써 중국인민의 독립과 해방에 토대를 닦아놓았습니다. 하여 조선민족이 일본파쑈의 기반에서 벗어나 독립과 해방을 전취할 날이 내다보이고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가장 위대한 국제주의로써 조선민족의 혁명운동을 시종 고무격려하고 부추겨주었습니다. 하여 조선인민은 조선과 동북에서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사람이 이어나가면서 일본파쑈와 피어린 투쟁을 벌릴 수 있었고 특히 7.7항전 후 중국공산당의 원조하에 우리는 조선민족해방운동에서의 한 견강한 력량인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여 중국인민과 어깨겯고 일본파쑈에게 침중한 타격을 안길 수 있었습니다.

동지들!

25년 동안 영용히 투쟁해온 중국공산당의 풍부한 경험 특히 중국공산당의 수령이신 모택동 동지의 빛나는 로작 《신민주주의론》과 그이의 영명한 령도작풍은 우리 조선민족해방운동의 지침입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인민의 해방의 구성일 뿐만 아니라 동방 피압박민족의 해방의 구성입니다.

우리는 중공 7차 대표대회의 개막을 열렬히 축하합니다. 대회에서 채택될 매 하나의 결의와 대회에서 확정될 방침은 꼭 동방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에 중대한 영향을 줄 것입니다. 7차 대표대회는 우리 조선인민들이 일떠나 일본파쑈를 물리치도록 용기와 승리의 신심을 북돋아줄 것입니다.

중공 7차 대표대회의 승리를 경축합니다!

중조민족은 친밀히 단결하여 일본파쑈를 소멸합시다!

중조민족독립해방 만세!

조선독립동맹 올림

연안 청량산(淸凉山)에 자리잡은 중공중앙기관지 《해방일보》는 5월 11일에 전문을 그대로 실었으며 일치하게 항일하자는 우리 당의 굳은 념원을 표시하였다.

5월 21일 대회는 제21차 회의를 열었다. 이날 조선혁명군정학교 부교장이며 7차 대회 대표인 조선인 박일우가 대회의 연단에 올랐다. 그는 연설에서 조선독립동맹 전체 동지들의 이름으로 모주석, 주총사령, 대회주석단 및 전체 대표들에게 경례를 드리면서 조선의 현실과 조선독립동맹의 사업형편, 앞으로의 과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박일우가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의 직접적인 령도하에 있은 조선독립동맹이 1941년에 건립될 때는 21명의 맹원밖에 없었지만 4년이 지난 오늘 화북과 화중에 1000여명의 맹원이 있다고 말했을 때 대표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조선독립동맹의 과업을 언급할 때 그는 당면의 급선무는 일제를 반대하는 모든 조선인들을 궐기시키고 그들을 묶어세워 반파쑈동맹국과 함께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며 조선인민의 철저한 해방과 독립을 전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조선사람은 꼭 민주를 쟁취하고 철저한 독립을 전취하고야 말 것이며 자유평등의 새로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고야 말것”이라고 강조하여 지적하였다. 박수소리가 다시 터져올랐다.

그가 강대한 쏘련과 강대한 중국공산당, 일본인민과 일본공산당의 방조 등 객관상의 유리한 조건과 자기의 주관적 노력이 있기에 조선인민이 다시는 망국노가 되지 않고 일제를 몰아내리라고 확신했을 때 대회장은 활기를 띠였으며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대회장에 울려퍼지였다. 박일우가 조선독립동맹의 현재의 과업을 제시하면서 “간부양성을 다그쳐 조선인민항일무장부대 다시말하여 조선의 팔로군을 조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바로 이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전체 대회장은 뜨거운 박수갈채로 차고 넘치였다.

7차 대회 기간에 모택동의 정치보고 ‘련합정부를 론함’이 연안 라가평에 전해졌다. 조선독립동맹과 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는 인차 진지한 학습과 토론을 조직하였다. 많은 동지들은 낮시간도 부족해서 아침체조를 하고 난 뒤 연하수(延河水)에 나가 세수를 하고는 《해방일보》의 정치보고를 조선말로 번역해서 읽었다. 그래도 만족되지 않은 동지들은 수면시간 8시간까지 떼내다가 꾸중을 듣기까지 하였다.

학습과 로동이 련일 깊이있게 진행되였다. 모택동 동지의 정치보고는 일제를 타승할 조선동지들의 신심을 보다 높여주었다. 더우기 “중국인민은 마땅히 조선인민이 해방을 받도록 방조하여야 한다.”는 정치보고의 내용에서 더욱 힘을 받았다. 그들은 과거의 투쟁행정에서 중국공산당이 자기들을 령도하여 중국인민과 함께 투쟁하게 하였다는 것을 잊을 수가 없었으며 자기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잊을 수가 없었다.

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는 모택동 동지의 사상과 풍부한 혁명경험을 잘 학습하기 위해 ‘학습위원회’를 특설하였다. 그리고 간부들은 매일 세시간씩 학습해야 한다고 규정하였으며 학생들이 서로 배워주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7차 대회 대표가 돌아온 후 학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그들은 ‘련합정부를 론함’의 정신과 실질을 장악하기에 힘썼다. 조선독립동맹 진수분맹(晋绥分盟)에서는 산하 동지들에게 “모든 력량을 적극 준비하여 동맹군과 배합작전함으로써 일본침략자를 타도하고 동방 각 민족의 해방을 전취하여야 한다.”고 지시하면서 ‘련합정부를 론함’을 계획적으로 깊이있게 학습하기로 결정하였다.

1945년 8월 29일은 조선이 일제에 의해 나라를 잃은 35돐 국치일이다. 조선독립동맹은 국치기념일인 8월 29일을 기하여 조선독립동맹 제3차 전체대회를 연안에서 소집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조선독립동맹 지도자들과 각지 분맹의 대표들이 연안으로 속속 모여들게 되였다. 무정 관련 일부 기념문장들과 연구저서들에서는 무정은 1945년 7월말에 비행기를 타고 태항산에서 연안으로 갔다고 쓰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1945년 7월말이라는 시간개념문제이다.

1945년 7월 7일자 연안 《해방일보》 뉴스는 “무정동지는 일전에 연안에 도착”하여 “연안에 있는 독립동맹의 전체 동지들과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전체 교원, 사무원들이 4일에 환영대회를 거행하였다.”고 밝히였다. 이 뉴스에 따르면 무정이 연안에 도착한 시간은 7월말이 아닌 7월 4일 이전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실증자료가 있다.

1945년 7월 1일, 연안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는 중국공산당 창건 24돐 기념대회를 라가평에서 가지였다. 기념대회는 “조선인민의 혁명에 대한 주덕 총사령, 팽덕회 부총사령의 직접적인 방조에 감사를 드리는 전보를 보낼 데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의미로운 것은 무정의 비서이며 조선독립동맹의 간부인 김영숙이 이날 기념대회에 참가하여 기자의 취재까지 받은 사실이다. 김영숙이 무정과 함께 태항산에서 연안으로 갔다고 할 때 무정이 연안으로 간 시간은 응당 7월 1일 전으로 되여야 한다.

여러 연구자료들을 보면 1945년 8월 1일 연안에서 연안포병학교 개교식을 가질 때 무정은 참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설까지 하였다. 이로부터 보면 새로운 문제가 또 제기된다. 7월 1일 직전부터 8월 중순까지 무정의 행적 문제이다. 무정이 연안 7.1기념대회에 참가하고 8월 1일 연안포병학교 개교식에 참가하였다면 두가지 물음이 떠오른다. 하나는 무정이 7월 1일 그때 연안으로 왔다가 태항산으로 돌아갔을가이고 다른 하나는 무정이 계속 연안에 머무르고 있었을가이다. 아직 누구도 이에 대해 확정적인 대답을 줄 수가 없다. 이 기간 무정의 구체 행적을 알리는 자료는 아직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둘중의 대답이 어찌하든 그 후 정세가 급변하는 8.15기간 무정은 연안에서의 활동을 보이고있다.

조선동지들 속에서

1987년 8월 연변인민출판사에서는 조선의용군 전사들의 회고문을 모아 장편회고록 《중국의 광활한 대지 우에서》를 펴냈다. 그네들은 거의 매편 회고문마다 자기들의 친애하는 사령관—무정 장군을 떠올리는데 무정 장군에 대한 그네들의 존경과 우러름은 실로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조선의용군에는 최정무(崔政武)라는 한 전사가 있다. 최정무는 로씨야 연해주 출신이고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서 1927년 12월 광주봉기에도 참가한 사람이다. 광주봉기 실패 후 그는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이르러 상해 중공조선인지부에서 활동하면서 무정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였다. 그후 그는 중앙혁명근거지 홍군기계수리공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중화쏘베트 1차 대회 조선인 대표로도 선출되고 홍군학교에서 학습하기도 했다. 1933년 5월 강서 길안현전투에서 다리부상을 입은 뒤에는 홍군 제3병원에서 오래동안 치료를 받으며 제3병원 제3소 정치지도원으로 활동하게 되였다.

1934년 10월, 중앙홍군이 서금을 떠나 장정길에 오른 후 최정무는 병원사업을 하면서 서금에 남게 되였고 국민당 대부대의 진공으로 당조직과 홍군부대와의 련락을 모두 잃게 되였다. 그는 조직을 찾아 동분서주하다가 호북성 경내에서 국민당군대에 붙잡혀 예비군 2등병이 되고 말았다. 그 뒤 최정무는 국민당부대를 따라 산서일대에서 활동하던중 그가 쟁취한 20여명의 의거인원을 데리고 팔로군 129사를 찾은 미더운 모습을 보인다.

팔로군 129사를 찾아 한 말.

“난 홍군입니다. 원 홍군부대를 찾게 도와주십시오.”

“그럼 무정 동지를 압니까?”

“알다 뿐이겠습니까? 나도 조선인입니다. 그가 어디에 있습니까?”

129사 지도일군의 물음에 대답하는 최정무이다. 이렇게 되여 최정무는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사업하는 무정을 만나게 되였다. 그 만남을 최정무는 감회 깊게 회고하고 있다.

지도일군이 무정 동지에게 전화를 걸자 무정 동지가 인차 나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는 막 나를 끌어안고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야,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왔구나!” 하고 반갑게 웨쳤습니다. 나는 어찌나 기뻤던지 눈물이 막 쏟아졌습니다. 목이 메여 나는 말도 못했습니다. 무정 동지는 나를 조선의용군에 편입시켰지요. 몇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고 넘어 나는 끝끝내 조직의 품에 안겼습니다. 미칠듯이 기뻤어요.

무정은 바로 이런 사람이였다. 자기 동지, 자기 부하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었다. 홍군이나 팔로군의 동지들은 물론이고 조선동지들과도 언제나 스스럼없이 어울리였다.

조선의용군 전사 최동광은 1942년 8월, 무정의 파견을 받고 10여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열하성일대 적후공작에 나서게 되였다. 때는 찌는 듯한 삼복철이여서 북상행군길은 쉽지가 않은데 설상가상으로 열병에 걸리여 진찰기변구에 이르러 한달가량 병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팔로군동지들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병이 나은 후 최동광은 계속 대적선전에 나섰다가 무정의 지시를 받고 1943년 4월에 진찰기변구에 들어섰다. 최정무는 또 열병이 도지였다. 태항산근거지로 돌아온 후에도 열병은 낫지 않아 하남점병원에서 장기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최동광은 운수대와 같이 적구에 들어가 소금운반에 나서겠다며 서면으로 거듭 총부를 들볶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무정 사령원이 친히 하남점병원을 찾아 병문안을 하였다. 그때 병문안을 최동광은 자기 회고에 담고 있다.

보아하니 동문 성미가 불 같은 사람이구만. 성질이 그렇게 급하고서야 어찌 열병을 치료해낼 수 있겠소? 병마를 이겨내자면 절대적인 안정이 수요되오. 동문 꼭 혁명의 승리를 위해 병마를 이겨내야 하오. 알겠소?

최동광이 회고하는 무정의 위안이다. 그러면서 최동광은 며칠 후 3.1상점 주임 최경하(崔京河)가 병원에 찾아 위문하면서 삶은 양고기를 침대앞에 내놓았다고 하였다. 최경하는 무정 동지가 동무의 신체를 념려하면서 양을 잡으라고 지시하였다면서 딴 생각을 말고 영양보충을 잘하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최동광은 “시멀건 좁쌀죽도 모자라서 강낭가루를 대수 섞은 풀죽으로 끼니를 에워야만 했던 근거지 대생산의 그 어려운 나날에 양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실로 옛말 같은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며 눈굽을 적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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