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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전설, 항일 장령 무정 장군의 인생비화
날짜  2017-12-18 8:31:53   조회  336

조선의용군의 녀전사 리화림의 무정 관련 회고를 보기로 하자.

태항산시절의 이야기:

1943년 4,5월경에 나는 무정 사령의 지시를 받고 조선의용군병원에 가서 일하게 되였다. 그때 조선의용군본부가 주둔하고 있는 마을은 팔로군병원과 멀리 떨어져 군민들이 병을 보이는 데 곤난이 적잖았다…

년말총화가 있은 후 무정 동지는 당중앙의 결정에 의하여 조선의용군 각 지대는 연안에 모여 군정훈련을 한다는 기쁜 소식을 알리고 그번 패에 연안으로 가게 될 명단을 발표하였다. 그 명단에는 나의 이름도 들어있었다.

연안시절의 이야기:

어느날 무정 동지가 나에게 중국의과대학에 가서 공부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광주에서 의학공부를 하다가 채 하지 못한것을 못내 아쉽게 생각하던 나는 그런 기회가 있으면 꼭 잘 학습하겠다고 말했다. 무정 동지는 자기가 이미 조선의용군에서 두 사람을 의대에 보내여 학습시키기로 의대책임자와 상론한 적 있다고하면서 학교에 갈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1945년 1월 나와 한 남성동무는 의대에 입학하였다.

1945년 8.15직후 이야기:

며칠 후였다. 조선의용군의 한 남성동무가 말을 타고 나를 찾아와 무정 동지의 편지를 전했다. 편지에는 조선의용군이 주덕 총사령의 명령을 받고 동북으로 진출한다는 사연과 함께 나더러 안심하고 공부를 잘하며 졸업장을 탄 후 부대로 돌아오라는 부탁이 씌여져있었다.

리화림은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조선의용군의 전우들과 갈라질 생각을 하니 적막감이 앞섰다. 그는 의대로 가게 될 남성동무와 같이 라가평에 가 무정을 찾아 자기 속심을 털어놓았다. 무정은 리화림을 위안하면서 말하였다.

“동무의 심정은 리해할 만하오. 하지만 혁명사업은 감정으로 대체할 수 없소. 조직에서 동무를 의과대학에 보내여 학습하게 한 것은 반복적으로 엄선한거요. 그러니까 혁명사업의 수요란 말이요. 항일전쟁은 이미 승리했지만 우리 앞에는 더욱 간고하고 더욱 복잡한 혁명사업이 놓여있소. 혁명이 승리한 후에는 간고한 건설사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나라에서는 전문훈련을 받은 의사가 필요하오. 동무는 절대 의학공부를 중도에서 그만두지 말고 다 배운 다음에 부대로 돌아오시오. 그때 가서 다른 사람이 동무를 붙잡아두더라도 내가 와서 동무를 꼭 데려가겠소.”

결국 리화림은 마음이 풀리였고 계속 의대에 남아서 공부하기로 결심을 굳히였다. 의과대학으로 돌아오니 왕빈 교장이 리화림을 자기 사무실로 불렀다.

“무정 동지는 떠나기 전에 친히 전화를 걸어 동무를 많이 돌봐달라고 부탁했소. 동무에게 무슨 곤난이 있으면 제때에 우리에게 말하도록 하오.”

리화림은 무정 사령원의 뜨거운 배려에 목이 메였다. 무정 사령원을 회고하는 리화림의 3편 회고담은 모두 《중국의 광활한 대지 우에서》에 실린 <진리의 향도 따라>에 담겨있고 그의 구술록 ㅡ 《머나먼 려정》의 <동북으로 진군하다>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리화림의 회고를 통하여 우리는 시기시기에 걸쳐 리화림에게 동지적 손길을 보내며 한 녀전사를 의료일군으로 키우면서 혁명의 승리에 대비한 무정의 한없이 넓은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이번은 조선의용군 전사 류동호의 회고담이다. 류동호는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란 장편회고록중의 한편인 <격정세월>에서 누구보다도 더 절절한 마음으로 무정 사령원을 회고하여 깊은 감회를 안겨주고있다.

류동호의 회고에 따르면 1943년 봄 무정은 태항산에서 활동하는 진한중(陈汉中)을 기로예(冀鲁豫)군구에 파견하여 기로예분맹의 사업을 료해하게 하였다. 그해 6월 기로예분맹에서는 류동호와 김선주(金善柱) 등에게 태항 화북조선혁명군사학교에서 학습할 기회를 주었다.

그들이 진한중을 따라 섭현 하남점에 이르자 무정은 친히 나와서 뜨거이 맞아주고 조선의용군의 하남점 병원과 상점, 리발관을 참관하도록 배려를 돌리였다. 때는 태항산대생산운동 고조 속이라 그해 1943년 8월 기로예분맹 동지들도 대생산운동에 나서게 되였다. 그들이 개간지로 떠나면서 신병으로 앓아누운 무정 동지에게로 작별인사를 가자 무정은 웃음띤 밝은 모습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였다고 한다.

“동무들은 대생산운동을 깔보아선 안됩니다. 동무들은 생산 가운데서 사상의식을 단련해야 합니다. 도토리 한알을 주었다면 우리 정치력량이 그만큼 늘어난걸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도라지 한뿌리를 뽑는다는 것도 일본파쑈력량을 그만큼 뽑아내친다고 생각해야지요.”

혁명의 대선배답고 사령원다운 무정의 풍모라 하겠다. 류동호는, 무정 동지는 바로 이런 분이라면서 “조선의용군의 훌륭한 지도자인 무정 동지는 그 당시 광범한 대원들 속에서 무척 존경을 받으신분이였다. 그때 무정 동지에 대한 미담은 조선의용군내에서 널리 전해지고있었다.”고 토로하고 있어 자못 인상적이다. 류동호의 회고에 의하면 무정이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부임된 뒤인 그해 1942년 추석 전날밤 조선의용군 지도부내 부분적 성원들은 밤늦게까지 회의를 가지였다.

시장기가 들자 지도부의 한 성원은 의용군의 녀전사를 불러 취사칸에 가서 추석날 아침에 쓸 음식을 가져오라고 하다가 녀전사의 거절을 당했다. 래일 쓸 음식이라는 녀전사의 말은 그른데가 없었다.

하지만 지도부성원이라는 사람은 마음가짐부터가 틀리였다. 밸이 꼬인다고 “계집애가 갖고 오라면 갖고 올 것이지 무슨 잔소린가?”고 으름장을 놓는 사람이였다. 이 사실을 알게된 무정은 이를 사소한 일이라고만 보지 않았다. 무정은 으름장을 놓은 그 지도부성원을 불러 엄숙하게 비판하였다.

“동문 그 문제를 사소한 일로 볼 수 있겠지만 이건 지난날 가난한 사람들을 깔보던 착취계급들의 악습이 상기도 우리 대오내에 남아있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소. 10여년이나 혁명했다는 사람이 혁명대오내의 동지를 그렇게 대한단 말이요? 그 녀전사를 찾아가서 잘 반성하시오.”

동지들에 대한 무정의 또 다른 사랑표현이였다. 그 지도부 성원은 자기 잘못을 깨달았고 동지들을 대하는 뜨거운 의리를 배우게 되였다. 조선의용군 지도부는 한사람같이 무정 사령원의 주위에 똘똘 뭉치였고 조선의용군의 여러 사업들은 전에없는 생기를 띠며 진척되여갔다.

2009년 8월 20일, 필자는 태항산에 자리잡은 하북성 섭현 섭성진 중원촌과 하남점진 남장촌을 찾아 보았다. 남장촌의 지부서기는 열성적으로 맞아주었다. 필자가 남장촌에는 당년 무정의 통신원으로 활동하던 왕안순 로인이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그는 곧추 왕안순로인댁으로 안내하여 주었다. 왕안순 로인은 금방 병원 신세를 진 한 80여세 로인이라고 하지만 내외간이 서로 받들면서 의좋게 생활하고 있었다.

필자가 이야기중에 무정 장군은 엄하고 무뚝뚝하지 않느냐고 묻자 왕안순 로인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자기 부하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한량없는 분이라고 하셨다. 자기가 무정의 경위원으로 있는 기간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이지만 무정은 잘못이 없는 한 자기 부하들을 홀대하거나 욕하는 일이 전혀 없으며 틀거지가 없이 누구와도 친형제처럼 스스럼없이 지내여 조선의용군 장병들은 너나없이 자기들의 사령원을 존경하며 믿고 따랐다고 눈굽을 찍었다. 중국인인 자기도 허물없이 대해주어 그는 무정 사령원과 못하는 말이 없었다고 한다.

무정은 또 시간만 있으면 신입전사들에게 2만5천리장정 이야기를 들려주군 하였다. 신입전사이고 맹원인 정철준네가 무정 사령원에게서 장정이야기를 들었고 신입전사 한청도(韩清道) 1938년 11월말 무정 사령원에게서 장정이야기를 들었다면서 관련 회고(주. 한청항일혁명회상록. 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12월, 제107페지)를 남기였다.

저녁식사 후 무정 교장은 나에게 2만5천리장정 때 홍군이 겪은 갖은 고난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또 서금에서 출발할 때 내가 알기로는 장정에 참가한 조선사람은 7명이였는데 장정중 전투에서 5명이 희생되고 장정 후에 또 한 사람이 희생되다보니 지금 장정을 겪은 사람은 나 하나 뿐이라고 하였다.

조선 동지들은 무정 퇀장, 그 후의 무정 사령원에게서 2만5천리장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장정에 대한 인상이 깊어지고 마치도 생동한 정치과강의를 들은 것만 같았다고 회고하면서 조선민족의 유일한 장정간부인 무정 동지를 보다 존경해마지 않았다.

 

조직과장 김영숙

1945년 5월 9일, 주덕 총사령과 당중앙에 올린 ‘화북조선독립동맹 1944년 1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사업경과보고’에서 무정은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조직, 선전, 경리 등 3개 부문을 건립, 충실히 하고 조직부 산하에 조직, 적구(敌区), 통신련락 등 3개 과를 설치하였다면서 조직부 조직과장을 김영숙(金英淑)으로 밝히였다. 사실 김영숙이 조선독립동맹 조직부 조직과장으로 알려진 것은 1944년 음력설 직전에 가진 일년사업총화에서이다. 이날 무정 사령원은 태항 조선혁명군정학교와 독립동맹의 도서관 관리원 겸 비서인 김영숙을 조선독립동맹 조직부 조직과장으로 임명한다고 선포하였었다. 이 김영숙이 바로 후일 조선으로 귀국한 후 무정 장군의 세번째 부인으로 된 조선녀성이다.

지금에 와 보면 김영숙에 대한 중국측이나 조선측 관련 자료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조선의용군 장병들의 회고문들과 일부 자료들에 섞이여 가담가담 흘러나올 뿐이다.

조선의용군 전사 류동호의 회고에 따르면 김영숙은 함경북도 웅기(雄基,청진?)의 한 지주집 딸로 태여났다고 한다. 생년월일은 밝혀지지 않으나 란영(兰英)으로도 통한다. 후에 처녀로 자라난 그는 망명한 련인을 따라 중국으로 왔고 중국혁명에 투신하게 되였다. 란영이는 일본말이 능한 데서 중경에 있을 때 매일 일본어방송 아나운서직에 충실하였다. 후에 란영이는 연안에 진출하여 항일군정대학에서 학습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태항산에서 활동하는 팔로군 129사에 배치되여 팔로군의 녀성간부로 나섰다.

1937년 9월 산서 평형관전역 이후 팔로군 115사는 산동 량산에서 또 한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량산전투(梁山战斗)에서 일본군 5명을 포로하였는데 그중 한 포로가 일본 동경대학출신의 고급 군의였다. 팔로군총부에서는 일본 고급 군의를 태항산으로 호송하도록 하면서 란영에게 개조과업을 맡기였다. 란영의 거듭되는 교육과 도움으로 일본군 고급 군의는 마침내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일본로농학교와 일본인반전동맹의 주요지도자로 전변하게 되였다.

1941년 1월 10일, 팔로군총부 포병퇀 퇀장 무정이 당중앙과 팔로군총부의 산서 료현(辽县, 오늘의 좌권현)의 동욕진 상무촌(桐峪镇上武村)에서 화북 조선청년련합회를 창설할 때 란영이는 129사에 있는 조선사람 대표로 회의에 출석하였으며 21명 회의참석자의 한 사람으로 되였다. 그 뒤 1942년 8월 무정 장군이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부임한 후에는 조선의용군 녀전사로 활동하다가 태항 조선혁명청년학교와 조선독립동맹의 도서관 관리원 겸 무정 장군의 비서로 사업하였다. 그때 조선혁명청년학교와 조선독립동맹 총부는 태항산근거지 섭현 중원향 중원촌에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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