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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전설, 항일 장령 무정 장군의 인생비화
날짜  2018-1-8 8:49:50   조회  44

1929년 10월, 김명시는 상해조선인지부의 주요책임자인 홍남표(洪南杓)와 함께 조선사람들에게 만주로 불리우는 동북으로 가서 재만조선인반일동맹을 조직하고 기관지 《반일전선》의 발행을 맡아보았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을 성원하는 반일시위투쟁이 벌어지자 김명시는 동지들과 더불어 할빈일본령사관 기습공격을 주도하였다. 또 동지들과 함께 조선인중국공산당원들로 중공아성(阿城)현위를 조직하고 부녀위원을 맡아나섰다.

1931년 5월, 김명시는 조직의 부름으로 상해로 돌아가 중공조선인지부 선전부 책임자로 되였다. 이듬해에는 혁명가인 오빠 김형선(金炯善)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서울과 인천 지역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벌리였다. 일본경찰의 검거가 좁혀오면서 김명시는 1925년 5월 중국 동북으로 피신하던중 신의주에서 불행히 체포되여 7년 형을 선고받았다. 출옥한 후 김명시는 조직을 찾아 태항산근거지로 들어가며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의 수하에서 활동하게 된다.

김명시는 1927년 6월 이후 상해조선인지부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인지부의 주요책임자들인 려운형, 무정 등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였다. 그 후 오랜만에 태항산에서 다시 무정의 지도를 받으며 혁명활동을 하게 되니 정녕 꿈만 같다. 김명시는 무정의 파견으로 서울 부근에서 활동하는 려운형 선생과 련계를 다시 맺게 되며 조선독립동맹 북평분맹의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천진분맹의 안병진과 깊이 어울리게 된다.

려운형 선생과 무정을 이어주는 직접적인 련락책도 김명시 녀성이였다. 하기에 김명시는 어떤 자료들에서 무정의 련인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추측에 불과하다. 무정을 너무도 모르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무정은 또 국내로 파견된 동지들을 통하여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14살-16살 때 시절 독립운동을 같이하던 세 친구를 찾았다. 그들도 변절하지 않은 채 중학교 선생으로 뛰고 있었다. 한 사람은 교장이고 두 사람은 교원인데 셋이 세개 중학교에 근무하는중이였다. 무정의 소식을 들은 그들은 매우 기뻐하면서 졸업하는 학생들을 민족독립운동의 항일대오로 이끌라는 등 무정의 의견을 받아들이였다. 또 조선의용군과 손잡고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싸워가겠다고 표하였다.

만주, 즉 중국 동북에서의 사업은 조선과 만주공작위원회의 조직과 함께 시작되였다. 무정과 조선의용군총부에서 파견한 동지들은 동북의 안동, 료녕, 할빈, 목단강, 길림, 훈춘, 사평, 통화 등지를 활동중심지역으로 삼았다. 무정은 사업경과보고에서 1944년 12월 27일의 그들 보고에 의하면 할빈 부근에서의 활동에서 조선독립동맹에 가입한 맹원들이 800여명으로 자리잡았는데 그들은 통하(通河), 목란(木兰), 동흥(洞兴), 신전(新甸), 대잠(带岑) 등지에 분포되였다고 하였다.

1945년 4월 23일의 그들 보고에서는 적들이 조직한 할빈의 ‘청년훈련소’에는 2000여명의 조선청년들이 있는데 조선독립동맹의 지하소조가 이미 이 청년훈련소에 깊이 들어갔다고 무정은 밝히였다. 무정은 사업경과보고에서 료녕의 농장과 소가툰(苏家屯)농장에도 이미 조선독립동맹의 소조가 각기 조직되고 금주에서 기동(冀东)에 이르는 연선에서 한개 공작조가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우에서 조선 만주공작위원회를 통한 조선 국내와 중국 동북 각지의 항일활동 정형을 개략적으로 헤아려보았다. 기실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무정의 항일독립활동은 40년대 초반과 중반에 이르러 비로소 시작된것이 아니고 서울에서 중학교 공부를 하던 10대 중반 시절부터 이미 시작되였다. 이는 무정이 1945년 5월 9일 주덕 총사령과 당중앙에 올린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사업경과보고에 똑똑히 밝혀져있다. 무정은 이 사업경과보고에서 “무정이 일찍 14세-16세 시절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고 지적하였다. 14살 때 3.1운동 참가가 그러하고 서울 시절에 벌써 려운형 등 독립운동가들과 거래하며 그들의 지도를 받으며 활동한 것이 바로 그러하다.

조선의용군 출신 한청은 자기의 회고록에서 “무정은 3.1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것은 그가 혁명에 참가하게 된 시발점이였다. 뒤이어 그는 서울청년단의 단장 직을 맡고 애국적 청년들의 항일운동을 지도하였다.”라고 하면서 서울시절의 무정은 서울학생들의 수령인물이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주. 한청항일혁명회상록. 연변인민출판사, 2011년 12월 출판, 제108페지)

무정이 18살 되던 해 1923년에 학업을 그만두고 압록강을 건너 북경행에 오른 것은 조선독립이란 원대한 포부를 이루고저였다. 그런 무정은 20년대 후반 시절부터 상해중공조선인지부에서 활동하면서 중국 북벌전쟁과 남창봉기, 광주봉기에 참가했던 조선혁명가들을 주도로 장차 조선혁명을 떠메고 나갈 동지들과 널리 손을 잡았다. 이런 동지들을 동북과 그 시절 강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혁명근거지에 파견한 것은 조선혁명의 래일을 위한 힘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 힘을 키우는 견강한 뒤심이 중국공산당이였다.

상해를 떠나 팽덕회가 지도하는 홍3군단으로 간 후에도 무정은 자기가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홍군과 중앙혁명근거지에서 활동하면서 무정은 홍군대오 속의 조선혁명가들인 양림, 장세걸, 최음파, 진덕근, 최정무 등과 친형제처럼 어울리면서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하나의 선에서 이어보며 래일을 바라고 싸워나갔다. 2만 5천리 장정을 끝내고 섬북에 이른 후에는 홍군총부에 이어 팔로군총부 작전과장으로 활동하면서 조선혁명가 서휘를 만나고 그를 통해 중국공산당 계렬 조선 동지들의 수령인물들인 리철부, 김산, 주문빈 등의 소식을 탐문하며 조선혁명을 떠이고 갈 조선 동지들의 통일된 단체를 무을 구상과 준비에 몰두하였다.

중국공산당과 팔로군 지도자들인 모택동, 주은래, 주덕, 팽덕회 등은 조선혁명가 무정을 한뜻으로 지지하면서 그 시절 팔로군총부 포병주임이고 총부포병퇀 퇀장인 무정이 나서서 1941년 1월 10일 태항산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직하고 지도하도록 하였다. 그 뒤 1942년 7월,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제2차 대회에서 본 련합회를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칭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으로 재조직한  것도 모두 중공중앙과 중앙군위, 팔로군총부의 비준과 지지의 결과였다. 무정이 온 힘을 다하여 조선의용군을 춰세우게 하기 위하여 중앙군위와 팔로군총부는 무정이 팔로군 포병퇀 퇀장을 사임하고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정식 부임하도록 하였다.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서의 무정은 비록 화북조선독립동맹 서렬 1위나 2위는 아니지만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을 대표하여 화북조선독립동맹을 직접 지도하는 사람은 바로 무정이였다. 무정은 중국공산당과 팔로군내 조선 동지들의 수령인물이였다. 이 지위는 누구도 대체할 수 없었다. 무정이 화북조선독립동맹 서렬 제1위나 제2위가 아니라 하여 무정을 한급 낮게 보는 것은 중국공산당을 모르고 무정을 모르는 견해일 수밖에 없다. 조선독립동맹이나 조선의용군은 조선 동지들의 독립적인 단체이고 군대임은 력사적 사실이지만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과 팔로군, 무정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며 조선혁명의 힘을 키워갔다.

무정의 직접적인 지도를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는 연안 《신화일보》의 한편의 기사(주. 신화일보, 1944년 8월 29일자)가 여실히 잘 보여준다.

화북조선독립동맹이 설립된 이래 무정 동지의 지도하에서 많고 많은 인원들이 적군와해와 조선인민들을 호소하여 일본군벌의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간고하고도 용감한 사업들을 벌리였다.

이는 무정이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실제상 지도자임을 너무도 잘 알리고 있다. 무정은 모두가 인정하는 조선사람들 화북항일단체의 조직자와 지도자이고 중국항전의 국제주의 전사였다. 중국공산당은 화북 조선사람들의 실제와 여러 면의 고려를 거쳐 이 국제주의 전사이고 혁명가인 무정이 나서서 화북에서 활동하는 조선혁명지사들을 단결하고 이끌어나가도록 위임하였다.

1941년 1월과 1942년 7월,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조직하고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결성할 때까지만도 허다한 조선 동지들은 조선혁명과 조선독립은 아득히 먼 장래의 일이라고 보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무정은 아니였다. 국내외 정세의 흐름과 판단으로부터 무정은 일제의 패망은 멀지 않고 조선독립의 그날은 멀지 않다면서 밝아오는 조선독립의 준비를 잘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동지들을 조선(한국)에 보내고 동북 조선인집거구에 보내며 항일의 기치 아래 중국공산당 계렬, 조선공산당 계렬, 민족주의 계렬을 구분하지 않고 조직을 무으며 동지들을 무으며 지하공작에 나서게 하였다.

한국 중앙일보 기자팀으로 발표된 ‘무정 비운의 혁명가’(상)를 보면 보다 잘 알린다. ‘무정 비운의 혁명가’(상)에 따르면 조선의용군 출신의 한 간부는 이 같은 증언을 남기고 있다.

무정이 팔로군 간부시절, 계속 조선혁명에 관심을 갖고 국내와의 긴밀한 련락을 유지했으며 해방이 가까워오면서 독립 이후 조선정치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나름 대로 정치적인 력량을 발휘하기 위해 모색했었다.

‘고뇌하는 혁명가 무정’에서의 한 증언이다. 이 증언은 1945년 5월 9일 무정이 주덕 총사령과 당중앙에 올린 1944년 1월부터 1945년 5월까지 화북조선독립동맹 사업경과보고와 전적으로 일치하다. 중앙일보는 여기 조선의용군 출신 간부의 또 하나의 증언도 소개하고 있다.

1944년 겨울에 벌써 무정은 독립 이후의 조선정치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무정은 “쏘련군대가 전쟁에 참전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쏘련사람 밑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쏘련말을 잘하는 양용(저자 주: 양림을 가리킴)이 있어야 하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쏘련이 대 일 선전포고를 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안했던 때입니다.

그야말로 조선정국에 대한 민감한 관심과 견해가 아닐 수 없다. 하기에 무정은 아래와 같이 당당히 말할 수가 있었다.

나는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서 싸웠다. 만약 조국의 독립을 침해하고 간섭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대포를 쏘아 묵사발을 만들 것이다. 그가 공산주의자일지라도 말이다.

(주. 《백발백중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상-. 위클리경향, 기사입력 2008.11.06 13:13)

8.15 그날 밤

1945년 7월 28일, 일본 정부가 ‘포츠담공고’(波茨坦公告) 접수를 거절하자 일본제국주의의 말로는 이미 대세의 흐름으로 되였다. 이해 8월 6일과 9일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广岛)와 나가사끼(长崎)에 원자탄을 투하하였다. 8월 8일 밤 쏘련은 일본에 대일선전(宣战)포고를 하고 이튿날 중국 동북의 일본관동군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으며 8월 9일 모택동은 연안에서 ‘일본에 대한 최후의 일전’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8월 10일 자정 12시부터 이튿날 11일 오후 6시까지 모택동이 기초하고 주덕 총사령의 명의를 띤 7통의 명령문이 련속 발표되였다. 그중 제6호 명령이 조선의용군에 내린 명령이였다. 그 명령이 바로 8월 11일 주덕 총사령이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 부사령원 박효삼(朴孝三), 박일우(朴一禹)에게 내린 연안총부 제6호 명령인데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쏘련홍군에 배합하여 중국 및 조선경내에 진군하여 조선인민을 해방하기 위하여 나는 지금 화북에서 대일작전을 하고 있는 조선의용대 사령 무정, 부사령 박효삼, 박일우에게 즉시 소속부대를 통솔하여 팔로군 및 동북군 각 부와 함께 동북으로 출병하며 적과 괴뢰군을 소멸함과 아울러 동북의 조선인민을 조직하여 조선을 해방하는 임무를 완수할 것을 명령한다.

총사령 주덕

1945년 8월 11일 12시

연안총부 제6호 명령이 하달되자 마침 연안에 머무르고 있던 무정은 조선독립동맹총부 동지들과 토의하고 총부산하 각 분맹에 전보지시(연안 《해방일보》. 1945년 8월 12일자)를 내리였다.

각 군구 정치부에서 각지 조선독립동맹 분맹에 전해줄 것. 일본이 이미 무조건 항복하였다. 각지 분맹에서는 전력을 다해 재중 적군내의 조선병사 및 조선거류민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여야 한다.

1. 일본제국주의는 이미 타도되였다. 일본파쑈가 철저히 소멸되고 조선민족이 신세를 고칠 날은 드디여 닥쳐왔다. 조선인민은 긴급히 일떠나 새로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워야 한다.

2. 적군내의 모든 조선사병들은 장관들이 어떻게 명령하든지를 막론하고 즉시 무기를 휴대하고 당지의 팔로군과 신사군에 항복해야 한다. 본 동맹은 그들의 안전을 담보하며 과거를 묻지 않을 것이다. 만약 계속 무모하게 저항한다면 꼭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며 친일주구나 전쟁범죄자로 판정,처리받을 것이다.

3. 조선거류민들에게 말해줄 것은 오직 우리측에 넘어와야만 생명과 재산이 담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시 일떠나 여러가지 방법으로 적군의 음모책동을 짓부시며 팔로군과 신사군을 도와 잃은 땅을 수복하며 조선독립동맹이거나 의용대에 참가하여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조선독립동맹 총맹

8월 11일

연안총부 제6호 명령을 받은 후의 무정과 조선독립동맹의 신속한 행동이다. 주덕 총사령이 11일에 연안총부 제6호 명령을 내린 후 연안에 있는 조선혁명군정학교는 이미 잠시 휴교하고 전체 인원들이 조선의용군에 편입되여 곧 개시될 동북으로의 진출준비를 다그쳤다. 리화림도 자기의 회고록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는 주덕 총사령이 1945년 8월 11일에 발표한 연안초우 제6호 명령에 근거하여 잠시 문을 닫았다. 전체 인원은 모두 조선의용군의 편제로 바뀌고 동북으로 진군할 준비를 하였다.”(리화림 구술. 머나먼 려정. 민족출판사, 2012년 5월 출판, 183페지)고 밝히여 연안 《해방일보》의 8월 15일자 기사와 어울리고 있다. 그러다가 조선 동지들은 8.15 일제의 항복일을 맞이하였다. 아래 조선의용군 장병들의 회고를 통하여 각지에서 일제의 항복을 맞은 정경을 한글자 꾸밈없이 돌이켜보기로 하자.

연안 라가평에서(1):

윤재덕은 ‘혁명의 학교’라는 한편의 회고문(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연변인민출판사, 1987년 8월 출판, 제282-283페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8월 중순의 어느 날 밤(저자 주: 8월 14일 밤)이였다.우리 군정학교학생들이 숙사뜨락에 앉아서 즐겁게 노래부르며 휴식의 한때를 보낼 때였다. 신화사에서 사업하는 조선동무들이 느닷없이 우리들 속에 뛰여들면서 일제놈들이 이제 곧 항복서에 조인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인심을 흥분시키는 특대 희소식은 삽시에 군정학교 전체 교원과 학생들 속에 퍼졌다. 하여 라가평언덕은 조선군정학교 교원과 학생들의 열광적인 만세소리와 환호소리로 들끓었다.

군정학교 교원과 학생들은 이 기꺼운 소식을 부근 백성들에게 알리려고 저마다 홰불을 추켜들고 시위행렬을 지었다. 숙사언덕을 내려선 시위행렬은 라가평마을을 오르내리면서 “항일전쟁 승리 만세!”, “중국공산당 만세!”, “모주석 만세!”를 높이높이 웨쳤다.

한없이 격동된 마을의 백성들도 홰불을 추켜들고 군정학교 교원과 학생들의 시위행렬 속에 뛰여들었다. 환희와 격정으로 충만된 여름밤 홰불시위는 샐녘까지 계속되였다.

윤재덕(尹在德)이 회고하는 신화사에서 사업하는 조선 동지란 누구일가? 《조선의용군사화》를 펴낸 김엽은 이 책의 ‘연안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 이 조선 동지는 신화사가 아니라 《해방일보》사라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8월 중순의 어느날 깊은 밤이였다. 중공중앙기관지인 《해방일보》사에서 사업하는 조선 동지인 김동무가 짙은 어둠 속을 헤치고 문득 라가평에 찾아왔다. 그는 저녁에 원고를 편집하다가 따스사에서 보도한 일본군대가 전체 전선에서 전면적으로 패배하였다는 신문원고를 보고 너무도 기쁜 나머지 그 걸음으로 5킬로메터나 되는 산길을 밤도와 달려 연하를 건너 라가평으로 왔던 것이다. 그는 군정학교의 동무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어서였다.

《조선의용군사화》는 2005년 7월 연변인민출판사에서 펴낸 사화집이다. 이 사화집의 저자인 김엽(金叶,원명 金龙吉, 1945년생)은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으로, 작가로 활약하면서 지난 세기 80년대에 팔로군과 신사군에서 활동한 많은 조선의용군 전사들을 방문하고 그들의 적잖은 회고문을 대필하였었다. 또 “중국의 광활한 대지 우에서” 집필조에 직접 참녜한 분으로서 《해방일보》사에서 사업하는 조선 동지 김동무란 믿을 만한 자료라고 보아진다.

연안 라가평에서(2):

《한청항일혁명회상록》에 따르면 조선의용군 전사 최강(崔康)(한청항일혁명회상록. 연변인민출판사, 2011년12월 출판, 제284-285페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에 일제천황이 무조건항복을 선포했다. 연안은 불야성을 이루었다. 이날 밤 비상소집의 나팔소리가 울리였다. 우리들은 학교강당 앞 광장에 모였다. 박일우 동지가 대오 앞에 나와서 자못 격동된 목소리로 “동지들,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오늘 일본천황이 무조건항복을 선포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두주먹을 불끈 쥐고 “조선독립 만세!”, “조선민족해방 만세!”, “위대한 항일전쟁 승리 만세!”, “중국공산당 만세!” 하고 소리 높이 웨쳤다. 우리도 따라 웨쳤다. 승리의 환호소리가 만리창공에 울려퍼지였다.

이 환호소리는 슬픔과 기쁨이 뒤엉키여 울려나온 것이다. 슬픔이란 35년간의 망국노생활의 슬픔이요, 기쁨이란 멘 마지막에는 그래도 일제침략자가 굴복한 기쁨이였다. 우리들은 식당의 석탄과 나무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불을 피웠다. 우리들은 우등불을 에워싸고 손을 잡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의용군행진곡’의 노래소리가 더욱 우렁차게 연안성에 메아리쳤다. 어떤 동무들은 솜뭉치로 홰불을 만들어들고 춤을 추었다. 우리들은 밤늦도록 미친듯이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춤을 추고 또 추추면서 즐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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