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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토길
□ 강효삼
날짜  2015-7-16 15:45:43   조회  985

시멘트로 길을 포장한 마을옆, 광활한 들판으로 통하는 한갈래 긴 길이 있다. 모래와 자갈길이다. 길은 곧추 들판 한가운데를 꿰질러 아득히 끝이 보이지 않는 저 먼 들까지 뻗어갔다. 농군들이 맨발바람으로 혹은 긴 고무장화를 신고 소를 몰고 뜨락또르를 타고 농사일 다니던 농경도로다. 워낙 오불꼬불한 논두렁을 따라 농경도로 역시 오불꼬불했지만 지난세기 70년대부터 기계화를 하면서 길도 곧아졌다. 그리하여 곧게 뻗어서 더 아득해 보이는 길 너머로 뭉게뭉게 떠다니는 흰 구름이 보인다. 농군들은 농경도로를 걸어 일하러 갈 때 먼발치에서, 혹은 쉴참에 논두렁에 누워서 팔베개하고 구름을 바라보군 했다. 그때 세상밖을 마음대로 떠다니는 자유로운 구름을 보면서 농민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가. 아직 가보지 못한 그 미지의 세상, 일이 힘들지 않고, 아니 더는 흙을 손에 만지지 않고 그러고도 배불리 먹고 잘살수 있는 세상을 동경하면서 언제가야 이 지긋지긋한 농사군의 신세에서 벗아나게 될것인가? 엉뚱한 꿈을 꾸지 않았을가?

이제는 다 옛말인듯 일년사철 고되게 이 길을 걷던 하얀 옷의 사람들은 간 곳 없지만 노상 이 길을 바라보면 추억도 많고 회포도 많다.

농토길은 순전히 농사를 짓기 위해 만든 길이다. 이 길은 농사일의 시작이면서도 또 총결하는 길이고 이 길은 풍년을 향해 가는 길이면서도 또한 풍년을 맞이해오는 길이기도 하다. 끝이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것처럼 그해 풍년도 미지수였다. 자연재재를 이겨낼 힘이 부족한데다 사람의 잘못으로 인재가 자주 들던 세월엔 더욱 그러하였다. 농민들의 말을 빈다면 벼이삭이 고개를 푹 숙여야지 아니고 빳빳이 쳐드는 날은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되는것이다.

그 세월 벼농사는 조선족농민들의 명줄과 같은것이였다. 이방인인 조선족이 이 땅에 와서 벌을 차지한것도 수전농사를 할줄 아는 덕을 많이 보았다고 해야 할것이다. 량식이 무엇보다 나라의 보배로 치부되던 세월, 그것도 옥수수나 조나 수수가 아니라 입쌀을 많이 생산하는 조선족, 입쌀이 아주 귀중하기에 알이 옥수수보다 퍽 작지만 입쌀을 일러 “대미”라고 하였다. 허기에 조선족은 어쨋든 벼농사를 잘 지여야 먹고 살고 나라에 보답할수 있었다. 허지만 농사가 안될 때는 농사가 잘 되는 곳으로 다시 또 보따리를 싸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대개 농사가 잘되는 곳은 농민들이 단합되고 수리시설이 좋은 곳이다. 그러나 그런 곳엔 이미 사람이 찰대로 차서 끼여들지 못하고 대신 신풀이를 노렸다. 그때만 해도 묵어나는 황지가 많았던것이다. 지금은 한족들이 조선족에게서 논농사를 배워 벼농사를 더 잘하지만 그 세월 한족들은 수전농사를 할줄 몰라 이밥맛을 보고싶어 신풀이할 때면 조선족농호들을 논물관리기술자로 초빙해가고 조선족생산대를 따로 내주기도 하였다.

덕분에 무리새가 굶어죽는다고 억지로 합친 합작사부터 대약진의 황당한 년대, 그보다 더 황당한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도 조선족들은 그래도 서북풍은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로동자와 농민, 도시민과 농민의 차별이 법적으로 주어진 당시의 현실에서 농민의 아들은 간혹 군에 가거나 어쩌다 대학에 가지 않으면 농민이 되는것을 불 보듯 뻔한것, 가난하여 공부를 시키지 못하니 직업을 못 찾고 초중쯤 졸업해도 농촌에 돌아와 신형농민이 되는것밖에 다른 출로가 크게 없었다. 기계화가 발달하지 못하여 손으로, 힘으로 하는 농사일을 그야말로 고되고 고되였다. 장화조차 없던 세월엔 맨발로 얼음이 서걱거리는 논판에 씨를 뿌렸고 선진영농인 모내기가 나왔지만 사람의 손으로 해야 하기에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손발이 얼어 감각이 없을 때가지 모내기를 했다. 가을에는 낫 한자루로 허리 펼 틈도 없이 벼를 베고 탈곡때는 먼지바람으로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 필자도 농사일을 해보아 잘 안다. 한 여름 뙈약볕아래 논김을 매노라면 그야말로 비지땀이 물 흐르듯 흐른다. 그래도 우리의 적지 않는 노래 가사들엔 “한평생 이 논에서 혁명위해 땀 흘리며 농사하리라.” 웨쳤고 농촌을 노래하는것이면 농민의 고달픔은 감히 써낼수 없었으니 리상적이고 과장되게 쓸수밖에 없었다.

아, 이제 비록 농사일을 해도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되는것 같다. 과학영농, 기계농사로 해마다 풍년이다. 큰 재해가 없으면 기본상 사람의 의지대로 농사가 되여주니 우리 조선족들이 한창 농사일에 열을 올릴 때 그런 세월이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가. 그 세월엔 늘 농민으로부터 가져가기만 하던 국가에서 이제 가져간것을 농민에게 돌려주고 있으니…

농토길은 흙으로 꼰 새끼줄이나 다름없다. 이땅 에 첫 발을 디딘 할아버지세대가 꼬고 이버지가 세대가 잇고 나의 세대까지 이어온 농토길이여!

농토길은 낚시줄이다. 농민들은 이 낚시줄을 벌판 구석구석 다 늘여놓고 황금물고기, 말하자면 풍년을 낚아왔다.

가을이면 농토길은 긴 꼬챙이였다. 가을날 줄레줄레 벼곡식을 수레 그득 박아싣고 농토길로 들어올 때면 마치 긴 꼬챙이에 잘 익은 불고기뀀을 잔뜩 꿴듯싶었다.

그러나 한편 농토길은 우불구불 긴 바줄이였다. 들판도 얽매고 농사군도 얽매고 그 후대까지 얽매는… 이 바줄에 한번 얽혀 농민이 되면 웬만해서는 벗어날 수없었다.

그러나 고쳐 생각하면 나쁘게만 생각할것이 아니다. 모종의미에서 농토길은 정체성을 보호해준 울타리이기도 했다. 힘들기는 해도 우리 조선족들이 우리만의 주거지를 편성해 살면서 제민족의 말과 글은 물론 풍속습관을 마음대로 발휘할수 있어 민족의 정체성을 고수할수 있게 된것은 아닌가. 오늘 대도시 진출로 하여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지면서 물질생활은 비약을 가져온 대신 정신적으로 특히 민족의 동질성을 보유하는데는 어려움이 많은것만 놓고 보아도 알수있지 않을가.

그런 의미에서 농토길은 하나의 “활주로”다. 이 “활주로”에서 농군들은 소수레나 뜨락또르가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연해도시로 날아갔다. 누구보다 가난하고 고생 많던 농사군의 운명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싶은 열망이 끝내 농토길을 벗어나게 한것이다. 이제 이 길에 총총 찍은 농부들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고 민들레꽃만 총총하게 현실을 수놓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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